지난 기획/특집

아프리카에서 필리핀까지 <1> - 아프리카의 기억

시발탄(필리핀)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10-27 수정일 2009-10-27 발행일 2009-11-01 제 2670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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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배 의지해 매일 공소 방문
아프리카에서 물이 없어 고생하던 이상원 신부가 이제는 매일 4~10시간씩 조각배를 타고 섬 지역을 방문하는 등 바다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진은 시에라리온 취재 당시 7시간동안 걸어 도착한 한 마을에서 만난 아이.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무명의 선교사, 이상원 신부가 필리핀 오지에서 새로운 사목에 도전한다. 가톨릭신문은 10월 중순, 필리핀 오지로 발령난 이 신부의 사목 현장을 방문, 취재했다.

# 2006년 4월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사람이 사는 곳인지 벌레가 사는 곳인지 구분이 제대로 가지 않았다. 지네, 모기, 개미, 그 밖의 이름 모를 수많은 벌레들…. 살충제를 뿌리고, 모기장을 치고, 모기향까지 피웠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이상원 신부(가시미로·49·레골레토 수도회) 숙소는 벌레들의 천국이었다.

시에라리온은 눈물의 땅이었다. 여자들은 매일 물을 길어오고, 장작을 패고,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하루 평균 걷는 거리가 20~30km에 달했다. 대부분 신발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맨발로 생활하다 보니 발은 거의 못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시에라리온 여성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수는 10~12명. 하지만 그 중 5~6명이 말라리아, 장티푸스 및 각종 질병에 의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었다. 마땅히 보낼 병원도 없고, 또 병원이 있다고 해도 병원까지 갈 차비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교육 받는 인구는 전체의 10%. 대부분 아이들이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마땅히 보낼 학교도 없고, 또 학교가 있다고 해도 학비가 없었다. 학교에 보낸다고 해도 노트와 필기도구를 살 돈이 없었다.

이 신부는 그 시에라리온에서 맨몸으로 사목하고 있었다. 고향은 소록도다. 한센병을 앓던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소록도에서 나와 떠돌다 한 외국인 사제의 도움으로 우연히 필리핀으로 갔고, 그곳에서 수도회에 입회, 사제품을 받았다. 레골레토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지 않은 탓에 한국에선 이 신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후원회도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무명의 선교사, 외톨이 선교사였다.

이 신부는 시에라리온에서 70개 마을을 사목했다. 들과 늪지대를 지나고, 밀림 지역을 통과하고, 산을 넘었다. 그렇게 하루 5시간씩 걸으며 마을을 방문했다. 목욕이나 샤워는 생각도 못했다. 걸어가다 냇물을 만나면 얼굴을 씻고, 급한 화장실은 산속에서 해결해야 했다.

제대로 씻지 못해 손과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묻은 그 얼굴로…. 이 신부가 환하게 웃었다.

# 2009년 10월. 이 신부는 지금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작은 조각배 위에서 바닷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 있다. 이제는 들과 산이 아니라 바다다. 태평양 귀퉁이를 작은 조각배에 의지해 매일 4~10시간씩 이동하며, 섬에 고립된 공소 40여 곳을 방문한다. 아프리카 오지에선 물이 없어 고생했다면, 이젠 필리핀 오지에서 바닷물과 사투를 벌인다.

제대로 씻지 못해 손과 얼굴에 바닷소금 푸석한 그 얼굴로…. 이 신부가 환하게 웃는다.

▨ 이상원 신부 선교 후원

신한은행 110-077-255287 예금주 이상원 신부

▨ 연락처 : 63-929-750-1356, 63-927-911-6279. sangwonlee2001@hotmail.com

시발탄(필리핀)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