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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열 번째 서한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0-21 수정일 2009-10-21 발행일 2009-10-25 제 266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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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떠나지 않게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들을 지도했던 배티신학교를 재현한 모습.
▧ 열 번째 서한에 대하여

최양업의 열 번째 서한은 그가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받은 후 답장을 보낸 최초의 서한이다. 이에 앞서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1854년 9월)에게도 편지를 보냈으나 그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1853년 중풍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교구장도 없이 전국에 있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해야만 했다. 1854년 장수 신부가 입국하자 최양업은 그를 통해 리브와 신부의 편지를 받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수 신부는 오랜 여행과 병으로 기진맥진해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최양업 신부 서한집’을 쓴 최석우 몬시뇰은 “이 기간 동안 잦은 박해로 성무집행이 가장 어려웠다”면서 “공소에서 습격을 받고 체포의 위기를 모면하는 등 파란이 많았다”고 전했다.

▧ 동골에서, 1854년 11월 4일

열 번째 서한은 장수 신부의 슬픈 선종 소식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 가련한 포교지는 왜 이다지도 불행합니까! 장수 신부님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시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고초를 그처럼 여러 해 동안 겪으시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입국하셨으나, 단 하루도 성한 몸으로 편안히 지내지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조선에서는 조정이나 백성들이 선교사와 교회를 비난한다고 전한다. 은밀하게 입국하여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하며, 선교사들이 함선을 타고 들어온다면 조선정부가 이것을 들어줄 것이 아니냐고 백성들이 말한다고 했다.

최양업은 사제 양성에도 관심을 나타낸다. 그는 1854년 3월, 장수 신부가 타고 온 배를 이용해 이 바울리노, 김 사도요한, 임 빈첸시오 등 세 명의 신학생을 상해로 보낸 사실이 있었다. 서한에서도 나타나다시피 최양업은 그들의 성격과 행실 등에 대해 설명하며 여러 부분을 염려하고 있다.

“지난 봄에 (배티의)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최양업은 또 조선에서 일어나는 신분과 계급의 문제, 신덕과 형제애의 부족,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 신자 공동체의 와해 등 다양한 조선사회의 폐단도 짚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릇된 것에 분노하면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사제였다.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 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비록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적어도 하느님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도록, 저와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