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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1)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대전교구 ②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0-21 수정일 2009-10-21 발행일 2009-10-25 제 266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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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년 간 수천 명 해미서 순교
관아로 압송된 이보현은 혹독한 고문에도 배교를 거부했다. 결국 ‘매질하여 죽이라’는 관장의 명을 받은 망나니들의 몽둥이질로 목숨을 잃었다.
대전교구 해미는 ‘순교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잃은 곳으로 유명하다.

병인박해 때만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그 이전 80여 년 간 계속됐을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 숫자는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현재 ‘해미성지’가 위치해 있어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는데, 이 가운데 ‘하느님의 종’에 속한 순교자로는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가 있다.

▧ 해미의 순교자들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2009년 6월 14일자 참조)를 꼽지 않더라도, 해미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신앙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 가운데 ▲인언민(마르티노)은 1737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느 날 황사영을 만나면서 신앙에 눈을 뜨게 된다. 천주교를 알게 된 그는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도 버리고 공주로 이주했다. 친척들은 모두 그를 이상하게 생각해 나무랐지만 그는 그 이유를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1797년 정사박해가 시작되던 어느 날, 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청주로 이송, 심한 고문을 받았고 다시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됐다. 당시 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걸을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해미에서 그는 젊은 이보현을 동료로 만나게 돼 서로를 권면하며 용기를 지켜냈다.

▲이보현(프란치스코) 또한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가 넘었을 때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부인은 바로 이보현의 누이다.

이보현은 약간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신앙의 진리를 깨달은 뒤로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권유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을 하기도 했다.

이보현은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정사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는 이틀 후에 포졸들에게 체포돼 관아로 압송됐다.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이보현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이신 천주님께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인언민과 이보현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감옥에서 만나 죽음을 함께하며 하느님을 증거한다. 갖은 형벌과 문초,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자 관장이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1800년 1월 9일, 인언민과 이보현은 63세와 27세의 나이로 각각 숨을 거두게 된다. 인언민은 매질을 한 후 큰 돌을 들어 가슴을 내리치는 형벌로 죽음을 맞았으며, 이보현은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는 형벌로 목숨을 잃었다.

인언민은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꿋꿋이 버티며 “그렇고 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라고 되뇌었다고 전해진다.

이보현 또한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의 질문에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님께 있으니, 어찌 그 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순교 후 교우들은 이보현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했다고 한다.

충남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성지. 계속되는 박해로 수천 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심지어 수많은 교인들을 한 번에 죽이려 생매장이 시행된 곳이다.
해미성지 내에 있는 진둠벙.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있는 이 개울에 두 팔을 묶은 죄인을 밀어넣어 죽였다 하여 ‘죄인 둠벙’이라 불리다가 말이 줄어 ‘진둠벙’이라 한다.
해미읍성 모습. 해미는 내포 지방에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곳에서 수천 명의 신자가 국사범으로 목숨을 잃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