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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0)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대전교구 ①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10-13 수정일 2009-10-13 발행일 2009-10-18 제 266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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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정산·덕산 등지에서 13명 순교
체포된 후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던 이도기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1798년 정산에서 순교했다.(탁희성 작)
올해 가을은 특별한 절기다.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는 순교자성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순교의 향기가 어느 해보다 짙은 이 가을, 우리는 이제 124위의 시복시성을 손꼽아 기다린다.

124위 가운데 하느님의 종 13명이 대전교구에서 스러졌다. 천주교 신자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홍주, 해미, 공주, 정산, 예산, 대흥, 덕산 등은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비명에 간 순교지다.

▧ 홍주의 순교자들

대전교구에서 ‘홍주’는 가장 많은 하느님의 종을 배출한 지역이다.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이 가운데 원시보(야고보)의 사촌동생 ▲원시장은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경 입교했다. ‘시장’은 그의 관명이다.

본래 원시장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해 어떤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주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데도 열중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원시장과 원시보를 체포해 오도록 했다. 이 때 원시보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나 원시장은 체포돼 홍주 관아로 끌려간다.

홍주 관장은 감사로부터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원시장에게 온갖 형벌을 내렸으나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으므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원시장에겐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시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님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그를 죽을 때까지 매질했으나 그가 죽지 않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죽이라고 명했다.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했고 그는 그곳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1793년 1월 28일, 61세의 나이로 그는 주님께 갔다.

▧ 정산과 덕산의 순교자들

정산과 덕산에도 각각 1명씩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된 순교자들이 있다. ▲정산의 이도기 바오로와 ▲덕산의 정산필 베드로가 그들이다.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는 본래 글을 잘 알지 못했으나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박해를 이곳저곳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다가 청양을 떠나 가족들과 산 너머 정산으로 이주한 뒤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그의 나이 54세가 됐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했다. 포졸들은 그의 집에서 십자고상과 교회서적 몇 권을 찾아 낸 뒤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매질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체포된 후 그는 자주 굶주려야했고 혹독한 추위로 고통받아야했으나 끊임없이 천주만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1798년 6월 10일 아침, 사형집행일이 되자 그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다시 혹독한 형벌이 시작돼 그는 실신을 거듭,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이틀 후,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여 버리고 오라’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포졸들은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겼고 그의 몸은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가 1798년 7월 24일 그의 나이 55세로 순교한 날이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정산필은 덕산의 순교자다. 그가 체포된 해는 1798년이나 1799년으로, 순교한 나이는 50~60세 사이로 추정된다. 하지만 덕산 관아에서 그가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으며 한 말은 분명히 기록돼 있다.

“천주님께서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오.”
홍주 동헌. 대전교구에서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 갇혀 고통을 받고 결국 생명을 잃었다.
이도기가 혹독한 형벌을 받은 정산의 현재 모습. 정산 관아터에는 현재 정산면사무소가 들어서있다.
교우들이 모여 살았다 전해지는 덕산의 모습. 이곳에서 체포돼 관아로 끌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