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내 어머니는 불을 만졌다

입력일 2009-09-29 수정일 2009-09-29 발행일 2009-10-04 제 266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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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구겨진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도 미약하나마 화장품이 있었고, 여인네들은 얼굴 희게 하기 위해 온갖 약초들을 구해 사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름’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심했던 셈이다.

나는 어머니가 빨래를 밟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바쁜 하루 중에도 시간만 나면 빨래를 밟았다. 그러면 어느새 그 빨래는 주름이 확 펴진 꼬들꼬들한 이불이나 옷으로 재탄생했다. 빨래를 밟는 것은 어머니의 무게로 빨래의 주름을 펴는 것과 같다. 그 무게는 바로 어머니의 삶의 무게였다. 어머니의 억장 무너지는 삶의 무게가 클수록, 다리미질의 기술도 늘었다.

주름을 편다는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긍정적인 상징성이 많다. 여인네들은 옷의 주름을 펴며 얼굴의 주름도 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의 주름도 활짝 펴질 것이라 믿었다. 이는 그 시절 여인네들의 순간 행복이었다.

두 사람이 빨래를 잡고, 한 사람이 마치 운전을 하듯 다리미질을 하는 모습에선 화합의 미학을 볼 수 있다. 여인 둘이 빨래를 잡고 이리 틀고 저리 틀면, 다리미질을 맡은 여인은 구석구석 주름을 펴나가는 것이다. 팔에 힘을 주고 좁고 후미진 곳을 옹골차게 후비듯 펴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내 어머니도 그렇게 다리미질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늘 단골로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어이구, 머리는 어디가고 몸만 앉았냐?” 빨래를 잡아주는 나의 요령과 지혜가 통 마음에 드시지 않았던 게다. ‘당겨!’, ‘이쪽, 저쪽’ 하시며 다리미질 운전의 구령을 외치시곤 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의 그런 지혜를 보면, 반드시 학교 교육만이 인간을 만드는 것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의 다리미질에서 놀란 부분은 따로 있다. 그 시절에는 동그란 달 같은 다리미에 숯불을 담아 다리미질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환한 불꽃이 이는 숯을 때로는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시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숯의 타지 않은 부분을 만지셨던 것인데, 그때는 어머니가 뜨거운 불도 척척 만지는 ‘신’같은 존재로 보였다. 불을 척척 만지는 그 삶의 경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삶이었고, 그로 인한 굳은살의 무감각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는 특히 그랬다. 아버지는 층층시하에서 언제나 겉돌았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하나 없었다. 24시간 일에 파묻힌 어머니는 손과 눈과 마음에 굳은살이 박여 뭘 보거나 집어도 그 상처의 아픔이 무감각하게 죽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비극’이라 부르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가족주의의 바닥을 깔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이룬 어머니의 사랑이었다고 말하려 한다.

다리미질은 그런 가족주의의 사랑에서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옷을 주름을 펴고 누기를 마르게 하는, 그러므로 인해 가족들의 몸이 마르고 펴지고, 기분마저 좋게 하는 일. 그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젯밤 조금 속 터지는 일이 있었다 해도 어머니들은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의 옷을 다리미질해서 따뜻한 온기의 옷을 입게 해줬다. 그 온기는 다리미질의 온도만은 아니었다. 바로 어머니가 당신의 남편과 아들딸을 생각하는 사랑의 온도였던 것이다.

다라미질이 단순히 주름을 펴는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터진 곳을 꿰매고, 얼룩을 지우고, 주름진 곳을 펴는 어머니의 사랑이 지금도 우리 안에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훈장이다. 이런 훈장을 매일 달다보면, 불도 손으로 척척 잡을 수 있는 기술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내 어머니는 신이었다. 어머니들의 삶을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오늘날 신세대들의 여성들이여. 그대들은 신의 자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