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김 추기경 추모 국제 학술 심포지엄]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비전

정리 곽승한 기자
입력일 2009-09-23 수정일 2009-09-23 발행일 2009-09-27 제 266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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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동의 시대에 풍랑·비바람 온몸으로 견뎌”
약자 편에서 사회정의 지킨 참 목자
일본 유학 기간은 한 인간으로서 성장·도약한 계기
2차 세계대전 겪으며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 다져
두 번의 전쟁 겪으며 ‘사제직’ 소명 다져
군사 독재정권 맞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
어려운 이 위해 대변자·보호자 역할 앞장
강우일 주교는 이 사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업적은 당신 스스로의 계획이 아닌 오직 하느님 뜻에 따라 순명한 삶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발제 : 강우일 주교(주교회의 의장·제주교구장)

나는 1977년부터 1998년까지 21년 동안 서울대교구청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살았기에 아마 이 자리에 초대됐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으로 그분을 나의 교구장과 장상으로 바로 옆에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학술적인 심포지엄 자리에서 그분의 삶을 논의하는 것은 심적 부담이 된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라도 자신과 생애를 함께 한 부모 또는 형제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연다면 비슷한 심정을 느낄 것이다. 김 추기경의 한 생애는 나와 아주 가깝고, 또 내 삶과 연결돼 있었기에 오히려 객관화시키기가 어렵고 어색하다.

한마디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사회와 가톨릭교회가 살았던 격동의 20세기 한복판에서 시대의 풍랑과 비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수많은 시달림을 겪다가 가신 우리 선배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분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나 미화를 하지 않고도 그분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길이며, 그분에 대한 예의이고 또 우리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길이라 생각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독립을 얻기 전 23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다스리는 식민지 상황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청년 김수환도 조국의 이런 상황에 대해 항상 마음으로부터 불만과 울분을 지니며 살았다. 자신의 언어를 억압당하고, 위로부터 덧씌워진 문화를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조선사회 전체의 굴욕적인 현실에 부당함과 분노를 느꼈다.

김 추기경은 언젠가 당신의 동성학교 재학시절 과거를 회고하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신 과목의 시험을 치르게 됐다. 수신이란 과목은 오늘날 윤리에 해당하는 학과목이다. 당연히 동서양의 철학자나 위인의 가르침에 대한 문제가 나올 줄 알고 시험 준비를 했는데, 그런 문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당시 일본 천황이 조선의 청년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해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묻는 문제가 나온 것이다. 이 문제를 받아들고 소년 김수환은 속으로 반감이 치솟으며 처음엔 백지 답안을 낼까 하다가 간단하게 몇 자 적었다고 한다.

‘첫째,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둘째, 그러므로 소감이 없다.’

김수환은 이런 답안을 내고 교장선생께 불려가 혼이 났다. 이 작은 사건은 소년 김수환의 가슴 속에 어떤 정신적 울분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회에서 아무런 권한이나 지위도 없고, 또 발언권도 없는 평범한 소년에 지나질 않았다. 체제의 모순과 민족의 불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저항 운동을 일으키거나 어떤 거사를 할 만한 연령이나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열심한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앙의 정신적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천주교는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해 일절언급을 하지 않았고, 되도록 만사에 있어 순명하며 사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 김수환도 마음속에 욕구불만이 가득했지만, 현실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굴의 강한 의지와 이념을 갖고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투사나 운동가는 아니었다.

김수환은 우선 소신학교 예과 과정에 들어갔다. 오늘날로 치자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였고, 그 예과를 2년 마친 다음에야 중등학교 과정인 소신학교 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이가 무슨 사제성소를 그렇게 느낄 수 있겠는가. 특히 그의 경우엔 스스로 성소를 느낀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께서 ‘너는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 한마디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소신학교 과정 중에도 특별히 신학교 생활에 애착이 가거나 보람을 느끼지도 못했다. 늘 집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리워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 번은 퇴교당하기 위해 일부러 규칙을 어기기도 했다.

대신학교에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사제성소에 확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으니 자퇴를 결심하고 학장 신부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단다.

‘저는 제가 원해서 신학교에 온 것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가라고 하셔서 입학했으니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학장 신부님은 그의 자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김수환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높은 이상을 향해 달려갔다는 것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떠밀려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는 대신학교 과정 중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일본 유학도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선발고사를 치러 합격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주교님의 호출에 따른 것이다. 뜻하지 않게 가게 된 유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청년 김수환은 일본 유학생활을 통해 조선에선 접하지 못했던 일본의 새로운 문화와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일본 상지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전에는 그냥 적대감과 반감만으로 바라보던 일본 문화를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비록 자신이 미워하는 나라지만 그 안에 긍정적인 면이나 배울 점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또 일본인이지만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렇듯 일본 유학 기간은 김수환이 한 인간으로서 더 크게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인격적 기반을 갖추는 양성의 기간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르러 전황이 급박해지자 동경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김수환은 학병으로 나가게 된다. 본인은 학병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버텼다. 그는 훗날 ‘조국을 위해서가 아닌, 남의 나라를 위해 누가 전쟁에 나가고 싶었겠느냐’고 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향의 친지들을 동원해 청년 김수환이 입대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가족들은 물론 나중엔 대구대교구장이 일본 행정당국에 몹시 시달렸다. 결국엔 교구장이 김수환에게 입대하라고 전보를 쳤고, 그는 그 전보를 받고는 바로 학병에 지원했다. 이렇게 억지로 떠밀려서 간 전쟁이었지만 청년 김수환은 이 전쟁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남방의 ‘부도’라는 작은 섬으로 파견된 그는 다행히 그곳에서는 직접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총을 쏘고 싸우는 경험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매번 위기를 모면하며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 전쟁이 그를 하느님께 대한 미지근한 믿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군사 독재가 일으킨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 죽음의 코앞까지 가서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된 셈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한 번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에 직면한다. 서울 신학교에서 신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년을 보내던 그는 부산까지 피란길에 오르게 된다.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성직자들이 공산군에게 붙잡히거나 납치돼 순교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그는 사제로 산다는 것이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임을 절감한다. 김수환은 한국전쟁과 성직자들의 희생을 보면서 자신의 사제성소에 대한 새로운 무게와 소명을 다지게 된다.

당시 세상은 언제 공산화 될지, 자유세계가 될지 모르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기는 김수환을 사제의 길로 이끌어준다. 그는 곧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앙과 신원의식을 정립했듯, 신학생 김수환도 두 번의 전쟁의 겪으며 희미하고 미지근했던 자신의 믿음을 뚜렷하고 굳건하게 확립해가며 사제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사제품을 받은 김수환 신부는 안동과 김천 지역의 두 본당에 파견돼 사목한다. 그 시대는 6·25 직후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나라 경제가 절단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본당 사목자로서 극도의 가난에 허덕이는 교우들에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노력하며, 그들과 동고동락한다. 그런 체험을 통해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각별한 친분 관계, 즉 목자와 양의 관계를 익혔다. 비록 길지 않은 사목생활이었지만 시골 지역 가난한 교우들과의 동고동락을 통해 그는 사목자의 기쁨과 보람에 흠뻑 젖어들었다.

불과 2년6개월 정도의 길지 않은 사목생활을 마친 김수환 신부는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독일 유학은 일본 유학 당시 기숙사 사감이었던 예수회 겟페르트 신부의 권유와 추천에 따른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지만 외적인 요인 때문에 처음에 목적했던 공부를 끝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7년 동안의 독일 체류와 공부는 어느 한 좁은 학문 분야에 국한된 편협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살아온 유럽 가톨릭교회 전체의 풍성한 문화적 소양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된다. 김수환 신부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 로마에서는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작됐다. 김수환 신부는 공의회 교부들이 이천년 가톨릭교회의 삶과 전통을 전반적으로 거론하며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모습을 흥분과 놀라움으로 지켜보게 된다.

어떤 의미로 보면, 그는 그곳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사전 예비 교육을 받은 셈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나는 해에 귀국한 김수환 신부는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맡으며 로마에서 들려오는 공의회 이후의 유럽 교회가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상을 낱낱이 소개함으로써, 공의회가 가르치는 새로운 교회상을 한국에서 펼쳐갈 한국 교회의 노정을 준비한다.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김수환 신부는 독일 유학 기간을 통해 앞으로 한국 교회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 학습 기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가 주교로 서품되던 1966년 한국 주교단에 이 새 주교만큼 교회의 새로운 여정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갈망하던 인물은 없었다.

마산교구장에 오른 2년 후인 1968년 그는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969년 그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의 첫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이 일련의 소임 이동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인생에 연타로 밀어닥쳤다. 자신은 전혀 예측도 못했고 감당하기에도 과중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파도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마치 옛날 어머니의 권유로 신학교에 간 것처럼, 밀려오는 파도에 온 몸이 내동댕이쳐지고 떠내려가기도 했지만,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물을 먹으면서도 발을 딛고 견뎌낸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감행하며 장기집권을 향한 발판을 마련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국회에 요구하며 독재를 합법화하는 첫걸음을 뗐다. 김 추기경은 이를 자유민주체제의 종식으로 판단했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직언을 통해 국가와 민족, 그리고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정임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 김 추기경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누군가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에게 그런 말을 해드릴 누군가가 있었다면, 결코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 추기경은 처음부터 성직자로서 사회문제 및 정치문제에 직접 나서서 발언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는 역사의 축을 거꾸로 돌리며 망하는 쪽으로 기우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당신이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향한 바른 소리를 쏟아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교회는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내며 군사정권의 비민주적 행태와 맞서게 됐고, 나아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핍박받고 검거된 많은 양심 세력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대열에 함께 하게 된다.

김 추기경은 이 과정에서도 결코 당신이 정부 비판 세력의 앞장을 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당시 정권을 쥐고 흔든 권력층이 이 나라와 백성의 숨통을 다 틀어막고 세상을 암흑으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양떼들의 목자로서,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추기경이란 직함을 갖고 당신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못 할 것이란 절박함에 떠밀린 것이다.

당시 김 추기경의 이런 발언과 행동을 놓고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주교단 안에서도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더러, 교구 내 사제단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졌다. 원로 사제들은 ‘세상에 정의가 세워지도록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젊은 사제들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김 추기경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울러 급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는 많은 희생을 치른 노동자들과 약자들의 대변자와 보호자가 되어줄 사회 지도층이 없었다. 김 추기경은 역시 떠밀려서 그들 곁에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카롤 보이티야’, 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 역시 기구한 역사의 질곡을 메고 살아온 분이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고, 후에는 소련 공산주의의 사주를 받는 폴란드 공산당 치하에서 성직자로서 살았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그분만큼 큰 이미지를 남긴 교황도 없다. 그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와 교회를 방문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정치·사회·문화·종교인들을 폭넓게 만나고 온 세상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대화와 화합의 장으로 이끌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위대한 사목적 발자취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나치 치하에서, 그리고 공산당 치하에서 오랫동안 단련시키시고 준비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군사독재 기간을 통해 김 추기경을 단련시키시고 준비시키신 덕분에 그분이 그토록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 추기경은 당신 스스로 계획하거나 작전을 꾸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 발 내딛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분을 계속 떠다 민 것은 하느님이셨다.

강우일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한국 사회와 가톨릭교회가 살았던 격동의 20세기 한복판에서 시대의 풍랑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가신 선배들 중 한 분이라고 말했다.
9월 17~18일 서강대 신학대학원 주최로 마련된 김 수환추기경 추모 국제 학술심포지엄 참석자들이 주제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1999년 2월 설날을 맞아 화재로 임시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서울 송파구 하훼마을 주민들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급속도의 산업화·도시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회적 약자들의 대변자·보호자가 돼 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1972년 8월 ‘현 시국에 관한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재정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남북 평화건설에 대한 정부의 노력과 경제인들의 책임있는 행동을 당부했다.

정리 곽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