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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기경 추모 국제 학술 심포지엄] 사진 자료들을 통해 본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와 활동

정리 곽승한 기자
입력일 2009-09-22 수정일 2009-09-22 발행일 2009-09-27 제 266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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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메시지로 한국 사회 나아갈 방향 제시”
- 발제 : 이장우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조선인들이 자발적인 노력으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창립한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사건인 동시에 유일한 사건이었다.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전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들은 ‘유교의 하늘’을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하늘’로 들어가고자 했고, 따라서 ‘유교적 조선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했다. 더 이상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사회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당시 사회의 주류 집단으로부터 반역자로 매도됐으며, 후대에서도 반민족적·반국가적 인물로 비난받았다. 그렇지만 천주교가 당시 사회에 던진 강력한 충격파는 흔들리고 있던 조선사회를 붕괴시키는 단서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반역자로 몰려 끝도 없는 희생을 강요당했다.

천주교는 마침내 1886년 조불조약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개신교회 역시 영향력을 확대시키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한국 사회의 근대의식 성립에 밑거름이 됐다. 그 결과 역사의 물줄기는 왕정(王政)에서 공화정(共和政)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박해시대의 천주교인들을 근대적 인간(近代的 人間)의 선구적인 전형(典型)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는 한말?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넘어 부정적인 평가마저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천주교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민족’에 대해 일종의 원죄의식 비슷한 것을 짊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마도 당시 천주교가 선교방침으로 내세운 ‘정교분리원칙’의 탓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 원칙에 따라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국권회복운동이나 독립운동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단죄하기까지 했다. 특히 파리외방전교회는 1659년의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훈령에 따라 영혼을 돌보는 성사 집전에 전념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서양문화의 우월감에 빠진 나머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파괴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따라서 지방 주민들과 마찰이 잦았으며, 이러한 충돌은 주민들의 마음속에 천주교와 가톨릭 문화에 대한 증오심을 남기기도 했다.

이 무렵 선교사와 신자들은 성사주의적 신앙에 매달렸다. 그 때문에 신자들은 신학문 교육을 회피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세속을 알면 그만큼 영혼 구제에 해로운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신자들에게는 선교사들이 금욕주의·고행주의·엄격주의적인 신앙으로 자신들을 지도했다는 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들을 ‘얀센주의자’로 인식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 태도를 가진 선교사들에게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김수환 추기경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 성사주의적 신앙에 충만한 교회와 한국 민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통치 아래 성장했다. 그렇지만 동성상업학교와 상지대학, 그리고 독일 유학을 거치면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제로 거듭 태어나 한국 사회가 그리스도적 가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 사회로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김 추기경은 한국 근현대사를 넘어서 한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성장했으며, 동시에 가장 역동적인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특히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6년 마산교구장을 거쳐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이후였다. 그는 교회 안으로는 ‘평신도도 신부·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교회 밖으로는 이제까지 세속의 일에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무르고 있던 점을 반성하면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봉사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제안했으며,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최형묵 목사(천안 살림교회)는 최근 간행한 「한국 기독교와 권력의 길」에서 “그리스도교는 이미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코드”가 됐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국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것은 특정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깊이 이해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어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가 ‘타자를 향한 개방성’에 있다”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나 아닌 바깥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실천하는 윤리로 구체화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내용을 이미 오래 전부터 깊게 인식하고 실행에 옮긴이가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가톨릭교회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고 전통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의 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보호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치유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 자신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한 일에 대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였다고 했지만, 그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 고비마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파수꾼 역할을 했고, 나아가 예언자적 메시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에서 드러나듯, 그는 생애와 활동을 한국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위해 바쳤다. 그 결과 18세기 이래 유교의 인간관과 우주관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주류적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200여 년에 걸친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갈등과 대립은 마침내 화해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 사회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8년 3월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 중인 동일방직 여공들을 직접 찾아갔다. 126명이나 되는 여공들이 해고되고 상당수 사람들이 구속·입건됐지만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입장을 피력한 것이었다.
1989년 2월 19일 성매매 피해 여성 쉼터인 ‘막달레나의 집’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 모습. 그의 행보는 사회의 어두운 곳까지 닿아있었다.
1986년 11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그는 한국사의 가장 역동적이며 어려웠던 시기에 교회를 이끌었다.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 착좌 당시의 축하식 사진. 김수환 추기경은 착좌 이후 세속의 일에 무관심했던 교회를 반성하며 세상에 나가 봉사할 것을 제안했다.

정리 곽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