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검은 대륙에 핀 생명의 꽃 - 아프리카 잠비아 선교 현장을 가다 (2)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9-08 수정일 2009-09-08 발행일 2009-09-13 제 2664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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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수녀님, 우리 수녀님”
14년 전 어린이·환자 돌보는 일 시작
헌신·노력으로 성당·병원·학교 건립
잠비아 땀부 지역의 여인이 고구마와 비슷한 나무뿌리식물 카사바 말린 것을 빻고 있다. 쌀은 구경하기도 힘들고, 옥수수가루조차 크게 부족한 시골 삶에서는 카사바가 주요 식량이다.
땀부 지역 어린이가 공놀이하는 모습. 폐비밀과 낡은 천조각을 뭉쳐 만든 축구공이라도 이곳에서는 귀한 장난감이다.
잠비아 시골 사정의 한때. 집집마다 수풀로 엮어만든 인사카 아래 혹은 흙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 식사를 준비한다. 부엌이 따로 없어 나뭇가지를 엮어 세운 선반에 냄비 등을 얹어둔다.
잠비아 지도.
사람부터 살려야 했다.

어제 ‘안녕’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아이가 오늘 가보니 죽어있다. 밤새 열이 났다는데 아무런 조치도 못했다. 황급히 다른 환자도 둘러봤다.

그런데 약이 있어도 먹일 수가 없다. 너무 오랫동안 굶은 몸이 약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숯을 찾아 불을 때고 죽을 끓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14년 전….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 창설자인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당시 총원장)에게 뜻밖의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주소지는 아프리카 잠비아 인돌라(Ndola)교구.

“아프리카에서 나와 우리 수녀회를 어떻게 알았지?”하는 의구심에 열어본 편지에는 절절한 도움호소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장 잠비아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헐벗었다는 표현 말고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부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부쉬(Bush, 수풀더미)만이 가득한 오지였다. 하이디 수녀 눈에는 1960년대 청계천 빈민가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해외원조 사도직에 나설 인력과 자금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그냥 둘 순 없었다.

이듬해 4명의 수녀들이 인돌라교구 내 폐광촌인 무풀리라(Mufulira)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빈민가 어린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환자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돌라교구에서 분리, 설립된 솔웨지(Solwezi)교구에서도 수녀들을 청했다. 무풀리라에서만도 허덕이는 수녀들은 도우러 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2000년에는 솔웨지교구 땀부(Ntambu) 지역에 수녀들의 발걸음이 닿았다. 무풀리라 수녀원에서 462km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숨차게 달렸다. 한순간이라도 쉬면, 그 시간에 죽어갈 이들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기도하는 시간 외엔 먹고 자는 시간까지 최대한 봉헌하며 사도직 활동에 나섰다.

잠비아 빈민들의 삶에 ‘생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곁에 가기 위해 부쉬를 헤쳐 가며 길을 만들었다. 앞을 가로막는 돌은 직접 깨부수어 자갈로 다졌다.

공소예절을 할 장소도 마련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해 우선 작은 성당을 지었다.

우물을 파고 병원을 세웠다. 에이즈와 말라리아는 물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학교도 짓고 농장도 만들어야 했다.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 교육은 필수였다. 설계도를 그리고, 땅을 파고, 벽돌을 구워 한장 한장 쌓는 일 모두 수녀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수녀들로서도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배워가며 뛰어들었다. ‘만날 집만 짓다 죽겠다’란 말이 절로 나왔다.

수녀들의 헌신과 노력,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알음알음 돕는 한국 신자들의 도움으로 잠비아에 점점 빛이 밝혀졌다. 무풀리라와 땀부, 안토니 지역에는 성당과 병원, 학교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도 수녀들의 일상은 여전히 식료품비와 약값, 교재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다.

수녀회가 활동하는 잠비아 선교지를 찾아 나서는데 꼬박 이틀 동안 비행기와 공항을 거쳐야했다. 잠비아 수도 루사카에 도착해서도 무풀리라까지 6시간여를 더 달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버스가 고장 났다. 정비공도 부속품도 찾을 수 없었다. 잠비아에선 고장 난 차량이 길 위에 서 있는 일은 너무나 흔하단다. 무풀리라에서 새 버스를 찾아 데리러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했다. 해가 지자 기온은 급속히 떨어졌다. 하루 온종일을 굶은 상태에서 아프리카 겨울 끝자락의 쌀쌀한 기운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드디어 무풀리라 수녀원에 도착했을 때 시계바늘은 새벽 4시를 지나고 있었다.

※ 잠비아 선교활동에 도움주실 분 : 우리은행 111-318370-13-001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02-773-0796~7)

잠비아교회와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

아프리카 남단에 위치한 잠비아는 한반도 4배 정도의 크기로, 196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에이즈와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아 국민 평균 수명은 35세 정도다.

잠비아 가톨릭교회 시작은 17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은 예수회가 진출하면서 시작됐다. 1923년엔 최초의 본당이 설립됐고 1931년엔 소신학교 문을 열었다. 2009년 8월말 현재 교세율은 24.03%이다. 대교구 2개를 포함한 10개 교구에 11명의 주교와 639명의 사제가 활동 중이다.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의 활동은 무풀리라 수녀원과 안토니미션(인돌라교구), 루위미션(솔웨지교구 땀부 지역)을 구심점으로 한다. 무풀리라에선 톼타샤(Twatasha)병원·인산사(Nsansa)학교·자카란다(Zacaranda)농장과 농업학교·고아원 등을, 2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안토니미션에서도 보건소와 학교를 각각 운영한다. 한국 후원회원들의 손길이 가장 크게 빛을 발한 땀부에는 루위(Luwi) 병원과 그레고리오에디타학교·사목센터 등이 있다. 특히 이곳에선 지금 간호학교 설립을 위한 터 닦기가 한창이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