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5) 수리산성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9-09-02 수정일 2009-09-02 발행일 2009-09-06 제 266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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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우촌 건설하고 복음전파에 헌신
최경환 성인의 초상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인은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신앙을 이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마리아)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성인은 자기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 존경 받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신앙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1836년에는 큰 아들 최양업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그의 서한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한다.

“제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신앙 지켜

성인은 1839년 교우촌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고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했다. 그리고 박해의 칼날은 그에게도 들이닥쳤다.

같은 해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성인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맞이하고, 음식까지 대접했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 성인은 집에서 잠든 포졸을 깨우고 스스로 앞장서 서울로 향했다.

아들을 외국으로 보냈다는 죄목으로 성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태형과 곤장, 치도곤 등 온갖 고초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9월 11일 곤장을 맞고 옥으로 돌아온 성인은 다음 날인 9월 12일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숨을 거뒀다.

성인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수리산성지(http://suri san.org/)는?

수리산성지는 은총의 대희년(2000년)을 맞아 희년 전대사를 위한 순례지로 지정되며 새롭게 문을 열었다. 최경환 성인의 묘와 십자가의 길, 순례자들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 ‘최경환 성인 고택’ 등이 있다. 미사는 매일(월요일 제외) 오전 11시 봉헌된다.

안양역에서 병목안 삼거리를 지나 성지로 가는 도보순례도 권장할만하다. 풍광이 빼어나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방문도 잦은 성지는 한국관광공사의 ‘2009년 1월 가볼만한 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문의 031-449-2842 성지사무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