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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여덟 번째 서한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08-26 수정일 2009-08-26 발행일 2009-08-30 제 2662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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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듯 높은 골짜기에 교우들이 살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순방했던 멍에목 교우촌의 현재 모습. 높은 산 사이에 숨어있는 옛 교우촌의 모습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 여덟 번째 서한에 대하여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 번째로 쓴 편지로, 최양업의 편지 중 가장 긴 것이고 동시에 가장 난해하다.

최양업은 이 편지를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로 추정되는 ‘절골’에서 작성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바쁜 사목활동에도 불구하고 부모 최경환·이성례의 순교에 대한 증언을 자세히 옮겨놓았다. 아버지, 어머니의 순교 상황을 편지로 알리며 찢어지는 아들의 가슴을 짐작해볼 수 있는 편지다. 이후 이 편지의 증언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그대로 수록됐다.

▧ 절골에서, 1851년 10월 15일

최양업은 우선 8개월 동안 공소를 순방했던 이야기를 전하며 박해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다블뤼 신부의 병환으로 그는 더 많은 교우촌을 혼자 순방해야 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 지른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그는 당시 그가 담당하는 공소 교우촌이 127개가 되며 세례명을 가진 이들은 5936명이 된다고 했다. 또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한밤 중에 모든 일을 끝마친 뒤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전한다.

당시 조선의 상황이나 법률 등은 최양업에게 너무나 큰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 중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으니 ‘상복’과 ‘한글’이었다.

“상복이 전교 활동을 도와주는 풍속입니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자식은 방갓을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덮어써서 땅만 내려다볼 수 있게 하고, 작은 막대기를 낀 얼굴 가리개로 입에서부터 코와 눈까지 얼굴 전체를 가리고 다닙니다. 이러한 풍속은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을 위해 발명된 도구라 할 만합니다. 한글은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에 대해서도 전한다. 주위의 증언을 통해 부모의 출생부터 신앙생활, 순교의 과정 등을 적었다. 부모의 참혹한 이야기를 편지에 적는 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밀려왔을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부모와 마을사람들이 체포됐던 상황을 담담하고 상세히 전한다.

“마리아(어머니)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렸습니다. 포졸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식사를 마치자, 프란치스코(아버지)는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 포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입혀 주었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명이 넘는 남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다음, 오랏줄에 묶이지 아니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