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73) 두려움에 대하여 ①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입력일 2009-08-12 수정일 2009-08-12 발행일 2009-08-16 제 266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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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향해 ‘성스러운 두려움’ 느껴라
영성적 삶 살며 ‘현세’ ‘하느님’ 향한 두려움 직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 분 뜻 알지 못함에 기인
자녀로서의 효성스러운 두려움 갖고 온전히 안겨야
“아~”(Understand:지성적 이해) 넘어 “오~”(Awe:영적 이해) 해야

가톨릭신문 독자들을 영성적 삶으로 초대하겠다며 겁 없이 뛰어든 것이 벌써 1년6개월을 넘겼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다. 그동안 나는 가톨릭신문 독자들과 일상 안에서 영성적 삶을 실현하기 위한 꿈을 함께 꿔왔다.

첫 작업은 ▲우리 각자의 원천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후 ▲우리 각자의 마음을 열고 ▲삶과 생명에 귀 기울이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예!’라고 대답해야 하는 삶에 대해 ▲신비를 비추어내는 삶에 대해 성찰했다. 마지막으로 우린 ▲은총과 함께 나아가는 삶의 풍요로움에 대해 묵상해 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성적 삶이 수도원이나 특정 장소와 상황 안에서만이 아닌 평신도들의 일상 삶 속에서도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음에도 글을 마치면서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무리 방법적으로 통달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삶 안에서 영성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성적 삶을 위한 일상에서의 몇 가지 당면 문제들에 묵상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려 한다. ▲두려움 ▲형성적 기투(나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에로 나아감) ▲경외 등이 그것이다.

일상 삶 속에서 영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두려움’이다.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악(惡) 혹은 고통의 예감 내지는 가능성을 접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이 두려움은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계와 관련된 두려움’과 ‘하느님과 관련된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자주 두려움을 체험한다. 좋은 차를 타지 못할까,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할까, 좋은 옷을 입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두려움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과도하게 집중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러한 감정은 외부적인 어떤 위험이나 비교행위부터 회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와 관련한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이 세계에 믿음과 의지를 두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이 세계 내적인 것들이 하느님의 가치를 대치하는 우상숭배가 행해지는 현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두려움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구약성경에서 볼 때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은 하느님과 접촉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외와 두려움을 유발시켜 주었다. 이러한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다.

물론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현대 영성의 사조에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두려움이 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은 세속적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은 자신이 벌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녀로서 갖게 되는 효성스러운 두려움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 그 자체로 느껴서는 안 된다. 두려워 하는 동시에 온전히 안겨야 한다.

베네딕토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를 볼 때, 또 나 자신의 체험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것이다. 우리 일생의 삶을 통해 경험한 무의식층 안에는 상당히 많은 초월적 의식이 있다. 문제는 두려움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면 이 초월적 의식이 떠오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두려움은 긴장감을 높이고 긴장감은 두려움의 강도를 더욱 높인다. 쉬어야 한다. 뛰듯이 달리던 걸음걸이의 보폭을 줄이고 멈춰야 한다.

내가 말하는 두려움은 하느님을 단순히 무서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지옥에 보낼 분이기 때문에 겁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다.

우리는 “아~”(Understand : 지성적 이해)를 넘어 “오~”(Awe : 영적 이해)라고 경탄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두려움은 하느님의 놀라움에 대해 경탄을 하면서, 그 하느님의 뜻을 감히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세속적 두려움이 아니다. 긴장되고 동요되며 공포를 느끼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성스러운 두려움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찾고자 하는 두려움, 하느님의 뜻을 감히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