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3> 초원에 핀 세 공소 이야기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09-07-08 수정일 2009-07-08 발행일 2009-07-12 제 2656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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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난 신앙심 빈곤에도 꺾이지 않아
나무 전신주와 나무 판자 담이 인상적인 몽골 야르막 공소 마을길. 사회주의체제를 벗어나면서 몽골인들은 담으로 자기 구역을 표시한다.
벤자민 가족의 모습.
“아니! 여기가 무슨 공산국가도 아니고 종교활동을 못하게 한다니 말이 됩니까! 혹세무민이라니요?!”

김성현 신부의 언성이 높아졌다. 몽골 항올본당 관할 공소 종모트 지역에는 아직 종교활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몽골 정부는 기독교 등 외래종교가 혹세무민한다 여겨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금지한다. 김 신부는 그러나 성전 건립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미 종모트에는 50여 명의 신자가 있다. 27개 군이 뻗어나가는 종모트는 놓칠 수 없는 선교의 거점도시다. 성전을 지어두면 더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종모트에서 울란바토르 항올본당까지 꼬박 1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 차도 없는 신자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당을 찾았다. 남의 차를 얻어 타거나, 쌈짓돈을 꺼내 버스를 탔다. 여차하면 걷기도 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김 신부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을 믿었다. 신자들은 종교활동 허가를 받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예수교가 다 무어냐? 너희들이 저 선교사들에게 홀려서 그렇다. 정신 차려라!”

공소회장 변바씨는 당당히 말했다.

“저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저들이 시켜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신을 자유롭게 믿고 싶어서입니다!”

하느님을 자유롭게 믿고 싶은 마음, 하느님께 당당히 나가고 싶은 신자들의 마음에 김 신부의 코끝이 찡해온다.

“힘을 냅시다. 우리의 진심을 세상이 아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겁니다.”

돌아서는 김 신부를 향해 신자들이 손을 흔든다. 저들을 위해 못할 일이 뭐가 있으랴.

김 신부는 차를 돌려 야르막 공소 벤자민의 집에 들렀다. 40명 남짓한 신자가 살고 있는 야르막은 항올본당의 모공동체다. 이곳에서 김 신부는 처음 아이들을 만났고, 본당 건립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벤자민은 김 신부가 사제로 키울 것을 염두에 둔 아이다. 성당 예비신학생 기숙사에서 지내던 벤자민은 방학을 맞아 집에 가 있다. 아이들이 떠난 성당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벤자민!”하고 부르자 조그마한 게르에서 막내동생을 안고 벤자민(어윤 벌뜨?16)이 뛰어나온다. 뒤로 줄줄이 동생 다섯이 따른다. 두 살배기 오른 톨, 여섯 살 쌍둥이 무흐 톨, 뭉흐 벌뜨, 여덟 살 어윤 톨과 열네 살 에륜 벌뜨. 벤자민의 형 따욱수릉(20)과 누나 어르흥 톨(19)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났다. 벤자민은 실질적으로 집안일을 도맡고 있다. 허리가 아픈 엄마는 집 한쪽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한다. 아픈지 5년이 넘었지만 진통제로 버티며 신발 봉제일을 하던 엄마는 지난 겨울을 지나면서 일어나지 못하게 됐다.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 도움으로 병원이란 곳엘 가 검사를 받긴 했지만 4~5만 투그릭(tg:몽골화폐단위)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 아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어, 현재 벤자민 가정의 수입은 아이들 앞으로 나오는 보조금 1만8000tg과 엄마 앞으로 나오는 연금 5만tg, 총 6만8000tg이 전부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큰 아들이 일이 있을 때 조금 보태기도 하지만, 생활을 꾸리기가 너무 힘들다. 한 달 10식구의 식비만 해도 적어도 10만tg다. 밥을 굶기 일쑤다. 전기도 몇 달째 끊긴 상태. 두 살배기 오른 톨에게도 먹일 것이 부족해 우유에 차를 넣은 묽은 수태차를 주로 먹인다. 그러니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마땅한 약조차 먹지 않고 있었다. 수녀님이 주신 칼슘제가 전부다.

“막내는 지금 한창 엄마손을 필요로 할 땐데….”

끝내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이들은 구호물품을 껴입고 있었다. 넷째 에륜 벌뜨는 너무나 헤져서 마음이 아플 정도인 등산 양말에 여자용 샌들을 신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열네 살, 에륜 벌뜨는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여섯 살 쌍둥이들은 카메라를 보며 연신 브이자를 그렸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꿈’이란 단어를 몰랐다. 다시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자, 뭉흐 벌뜨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고개를 자꾸만 숙이던 에륜 벌뜨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 “자동차정비사요….” 벤자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달픈 현실에 벌써 꿈을 접어버린 걸까. 김 신부는 벤자민의 집을 나서며 주머니를 탈탈 털어 엄마 손에 돈을 쥐어준다. 그날 밤 벤자민 집에는 불이 켜졌다.

가정방문을 마친 김 신부는 저녁미사가 있는 니세흐 공소로 향했다. 예정보다 일정이 1시간이나 늦어졌다.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니 김 신부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40여 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는 니세흐에는 종교활동 허가가 났지만 미사를 드릴 성전이 없어 게르를 지었다. 아이들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선교사 라프의 기타소리에 맞춰 아이들은 목청껏 찬양을 바친다. 김 신부는 다시 한 번 ‘끄응’하고 아랫배에 힘을 준다. 저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랴. 종교활동 허가나 성전건립기금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이 밀려와도, 가난에 굶고, 현실에 쪼들려 꿈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도, 걱정할 것도, 의심할 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다. 하느님 축복의 빛깔이 내린 6월의 푸른 초원 위, 세 송이 믿음의 장미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후원계좌 381-18-21975-6 외환은행 (예금주 김성현)

■ 몽골 항올본당은…

2002년 8월 15일, 몽골 지목구장 웬체슬라오 S. 파딜랴(Wenceslao S. Padilla)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한 몽골 항올본당은 신자수 300명, 공소 3개(니세흐, 야르막, 종모트)의 작은 공동체다. 그러나 몽골 전체 신자수가 650명임을 감안할 때, 그의 50%에 달하는 신자가 몽골 항올본당 소속이란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몽골 항올본당은 신자수가 적지만 본당으로서의 모습은 대부분 갖추고 있다. 특히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한 청소년사목이 주축이다. 교사회를 중심으로 한 청년활동도 눈에 띈다. 매주 금요일 봉헌하는 청년미사와 목요일의 정기 교사회합은 항올본당이 선교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뿌리 역할을 한다. 성인 신자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오는 8월 15일에는 본당 최초 몽골인 신심단체인 레지오가 탄생한다. 빈첸시오회가 어린이집을 꾸려 봉사하고 있다. 이들은 교도소를 방문하기도 해 교정사목의 초기 모습을 보인다.

항올본당은 복음 실천을 위해 다양한 간접 선교사업도 펼치고 있다. 성당 1층에 장애인쉼터를 마련했고, 지하에는 물 이용이 여의치 않은 몽골인들을 위한 샤워장도 설치했다.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다. 성물을 제작 판매해 본당 자립을 시도할 계획이다. 작은 규모의 농장도 운영한다. 소 20마리와 말 2마리, 염소 40마리를 현지 유목민에게 맡기고 돌보게 했다. 몽골 신자들의 진정한 자립을 위한 유목민 문화의 모범을 만들고자 함이다. 작은 텃밭도 가꾼다. 농장에서 나온 우유로 유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사업도 벌인다. 질이 좋아 인근에서 인기를 끈다. 유목민 문화센터 설립도 계획 중이다. 유목민들과 함께 현안의 문제를 고민하고 교육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미래에 이 센터에서 일할 유학생도 지원하고 있다. 총 12명의 학생이 한국에서 축산과 수의학, 경영학 등을 공부 중이다.

몽골의 길에서 만난 아이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에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나 생활에 대한 걱정이 깃들어 있지 않다.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