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2> 초원에 싹트는 신앙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09-07-01 수정일 2009-07-01 발행일 2009-07-05 제 2655호 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성전 생기자 신자들 하나둘 모여들고
몽골 항올본당 관할 니세흐 공소 게르 성당의 모습.
초원에 게르를 짓고 사는 가족을 방문한 김성현 신부가 유목민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집이다!’

몽골 항올본당에 도착한 김성현 신부는 제일 먼저 성모당을 찾아 성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잘 다녀왔습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한 달여의 모금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 신부를 예비신학생 산자와 몽골인 선교사 자야가 반갑게 맞는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된 산자는 김 신부가 처음 울란바토르에 와 함께 기도하던 아이들 중 하나다. 김 신부가 몽골지목구장 웬체슬라오 S. 파딜랴(Wenceslao S. Padilla) 주교의 명에 따라 항올본당 설립 임무를 맡았던 2001년 신자도 선교사도 성전 건립기금도 하나 없던 시절, 김 신부는 자신의 곁으로 모여든 아이들의 눈망울에 희망을 심었다. 몽골인들의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리지도, 선교 책자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김 신부에게 왔다.

“자야, 졸라, 수산나, 산자, 아자, 비, 어귀, 둡칭, 타우가, 바타, 바이라, 호따, 타우린…. 그 아이들이 어디서부턴가 찾아왔어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아이들이죠. 야르막(몽골 항올본당 관할 내 공소 중 하나)에 모여 함께 기도했지요. 아무것도 없던 시절, 그 아이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초원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천막집을 짓고 사는 몽골인과 함께 벽돌로 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신자라고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전부가 아닌가. 김 신부는 아이들과 함께 항올본당 설립을 위한 묵주기도 8만단 바치기를 시작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성전을 건립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졌다.

“1단을 바치면 1달러를 모을 수 있을 거야. 우리 함께 기도하자.”

아이들은 조막만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렸다. 아이들의 신앙심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김 신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려울 때마다 찾게 되는 신자들, 고맙게도 한국의 신자들은 언제나 김 신부의 편이었다.

“처음 지어진 몽골 항올성당은 모두 신자분들의 후원금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저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담아주셨습니다. 그 후원금으로 땅도 사고, 건물도 지었습니다. 예비신학생 기숙사도 만들었습니다. 힘들게 살아가던 아이들이 성당에서 지내며 사제를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든든한 후원금을 안고 돌아왔던 김 신부는 2001년 9월 초, 성당 터를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앞으로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던 지금의 항올본당 자리, 그 곳을 바라보며 김 신부는 신앙의 꿈을 심었었다.

‘성전을 지어놓으면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겠지…. 신자들이 저 공원을 거닐며 기도하겠지…. 모든 걸 하느님이 마련해주시겠지….’

하느님께서는 성전도, 신자도, 선교사도 모두 마련해 주셨다. 2002년 8월 15일, 몽골 항올성모승천본당을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후 거짓말처럼 선교사들이 찾아왔다. 폴란드 평신도 선교사 부부 라프와 고샤였다. 김 신부는 무릎을 쳤다. 신자들도, 예비신자도, 선교사도 하나둘 항올본당으로 모였다.

몽골본당 사목,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홀로 해야 하는 번역 작업이 많았다. 미사 경본은 마련돼 있었지만 본기도와 그날그날의 기도문들은 급조해 만들어야 했다. 혼배성사를 위한 혼인 예절서, 장례미사를 위한 연도문부터 시작해 주일학교 아이들 출석부까지 하나하나 김 신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불을 밝히고 앉아 번역 작업을 하고 있으면, 창문 밖으로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예수스 크리스테 예수스 크리스테(예수 그리스도)’하며 돌을 던지고 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김 신부는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애썼다. 성가책이라고 해야 A4 파일에 프린트한 악보를 끼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매일 미사도 모두 창 미사로 봉헌했다. 부활 자정 미사도 밤 10시에 시작해 새벽 1시에 마쳤다. 생략할 수 있는 것도 되도록 생략하지 않았다. 몽골 신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미사 봉헌금을 낼 수 있도록 헌금 봉투도 마련했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마음’을 적어 봉투에 넣도록 했다. 하느님께 소중한 무엇인가를 봉헌하는 마음을 알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몽골신자들이 내는 50~100투르그(1투르그≒1원) 꼬깃꼬깃한 돈들이 모여들었다. 1주일 통틀어 봐야 몽골신자들이 내는 헌금액은 2~3만 투르그에 불과하다. 그 돈들을 투명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여 공동체 전체가 먹는 빵을 사는데 썼다.

“몽골 물가는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소득 수준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의사나 대학교수 등 소위 엘리트 그룹의 한 달 소득이 20~30만 투르그입니다. 한 달 8~9만원의 보조금으로 10명의 식구가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보다 못한 하층의 경우에는 쓰레기나 병을 줍거나, 기차에서 떨어지는 석탄을 주우러 다녀요. 기차에서 석탄이 떨어지지 않으면 기차에 올라타 석탄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사고가 나 죽기도 했고…. 그런 신자들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입니다.”

한 달여의 모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 집전한 주일미사, 김 신부를 바라보는 몽골 신자들의 눈길에서 반가움이 묻어난다. 초원 위에 천막을 짓고, 그 안에 다섯 명이든 열 명이든 온 가족이 모여 수돗물도 전기도 없이 사는 나라, 혼전 동거와 이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거리에서 쓰레기를 줍는 나라. 그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성전, 항올본당 지붕 아래 신자들이 모여 신앙을 싹틔우고 있었다.

※ 후원계좌 381-18-21975-6 외환은행 (예금주 김성현)

■ 몽골 교회 현황

몽골에 처음 가톨릭 신앙이 발을 디딘 것은 1992년 7월 10일 원죄없으신 성모성심수도회(CICM) 선교사 3명이 입국하면서부터다. 이들 선교사 3명은 울란바토르 호텔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선교활동을 시작, 이후 94년 9월 23일 몽골 법무부로부터 NGO 단체로 인증을 받았고, 96년 6월 15일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의 직속 선교대상지가 됐다. 같은 해 현재의 주교관인 성 베드로바오로본당을 완공했다. 당시 한국 주교회의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96년 대구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SPC)가 몽골에 진출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했던 공부방은 현재의 쎈뽈초등학교와 몬테소리 유치원으로 자라났다.

97년 말 대전교구 이준화 신부, 2000년 대전교구 김성현 신부가 ‘신앙의 선물 사제’(사목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교회에 파견되는 선교사제. 아프리카 및 제3세계에 사제들을 신앙의 선물로 보내자고 한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에서 시작됐다)로 입국했다. 2002년 몽골의 두 번째 본당인 항올본당(주임 김성현 신부)이 분리돼 나왔고, 2006년 셍헌칭 착한목자본당이 게르 성당으로 시작했다.

현재 몽골에는 4개 본당(성 베드로바오로본당, 항올 성모승천본당, 셍헌칭 착한목자본당, 다르항 도움의성모 본당), 6개 공소(지목구장 직할 쇼보, 성 베드로바오로본당 관할 데르흐, 항올본당 관할 니세흐·야르막·종모트, 콘솔라타회 관할 아르베헤)에서 24개국에서 온 87명의 선교사(사제, 수녀, 평신도 포함)가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중 5명이 ‘신앙의 선물 사제’이고 이 가운데 4명이 대전교구 출신(이준화, 김성현, 허웅, 박주환 신부)이다.

몽골에는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의 활약이 눈에 뛴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SPC)에서는 쎈뽈초교, 몬테소리 유치원 등을 밑거름으로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수수도회(CJ)에서는 가톨릭 선교 도서관과 청소년 교육을 위한 메리워드 센터를 운영한다. 살레시오회에서는 한국의 이호열 신부를 주축으로 해 돈보스코 기술학교, 청소년 센터를 꾸려나가고 있다. 마더 데레사 사랑의 선교회(MC)는 야르막에 미니스쿨과 노인 복지 시설을, 원죄없으신 성모성심수도회(여자·ICM)는 장애인 교육센터를, 원죄없으신 성모성심수도회(남자·CICM)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콘솔라타회에서는 아르베헤에서 공동체를 꾸려나가고 있다. 이들은 몽골 선교 초기부터 노숙인, 노인, 청소년, 장애인, 청년 등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쳐왔다. 또 2개의 농장을 운영하며 몽골인들의 생활 자립을 도왔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몽골에 의료클리닉을 실시하는가 하면, 유목민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하거나 장학금 지원을 통해 교육을 돕는다.

이런 선교 활동의 주축이 되는 것은 단연 한국인 선교사들이다. 몽골 전체 신자 650명 중 300명이 김성현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몽골 항올본당 소속이며, 6개 공소 중 절반인 3개 공소 역시 몽골 항올본당 관할로 그 동안 한국의 선교사들이 흘린 땀의 결실을 보여준다.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몽골신자들의 모습.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