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아시아교회가 간다] 아시아 교회 연대 그리고 복음화 향한 대장정 19. 일본 (4) 빈민사목 현장 탐방

일본=신정식 기자
입력일 2009-06-25 수정일 2009-06-25 발행일 1998-07-26 제 2112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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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0주년 특별기획ㆍ현장르포
빈민사목, 희망 잃은 노숙자 삶의 버팀목
노동자ㆍ노숙자 황폐한 삶 “충격”
한국인 많은듯 국내 신문 판매
가톨릭 6개ㆍ개신교 3개 단체 협의체 구성

무료식사 제공부터 대정부 로비ㆍ압력까지

노숙자 고독 덜어주고 희망 찾아주려 노력

일본 오사카 「가마가사키」. 굳이 서울과 비교하자면 청량리 정도에 위치한 일본의 대표적인 빈민 지역이다. 부랑자 혹은 일용 노동자라 불리는 떠돌이가 97년말 현재 약 3만 명 정도 살고 있고 이중에 9백여 명은 일정한 잠자리가 없는 노숙자들이다.

이 지역을 찾은 시각은 낮 12시경. 공기부터 탁했다. 잘 씻지 않은 사람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도시 전체에 배어 있었다.

관공서 담장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사람 행렬. 식사 배급을 기다리는 노숙자들이다. 개중에는 힘없이 쓰러진 사람, 술에 절어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정신없이 무엇인가 주절거리는 사람, 휠체어에서 나뒹굴어 죽은듯이 보이는 사람 등등 천태만상이다.

지금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정경이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낯설기만한 이런 모습들이 과연 경제대국 일본의 뒷모습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이들은 2년전 동경 신주쿠에서 보았던 깔끔한 인상의 홈리스(Homelessㆍ노숙자)들과는 또 달랐다.

카메라를 갖다대는 기자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몇몇은 따라오면서 무엇인가 항의하듯 몇마디 말을 건넨다.

긴장한 채 서둘러 이 곳을 벗어나 노숙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삼각공원(三角公園)을 찾았다. 배식을 시작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식기를 든 사람 행렬이 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원의 한쪽은 배급을 기다는 노숙자들이, 다른 한쪽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 끼를 때우는 노숙자들이 메우고 있고 그나마 사이사이 빈자리는 비둘기 떼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감정을 자극할까봐 감히 카메라는 꺼낼 엄두도 못냈다. 낯선 이방인을 보는 경계와 호기심의 눈빛 때문에 공원안에 발을 들이밀지도 못하고 담장 따라 걷기만 했다.

공원 주변 건물에는 노숙자들과 일용 근로자들을 돕기위한 자선단체들이 입주해 있다.

오갈데없는 노숙자나 노동자들에게 텔레비전 소파 취사도구 등 최소한의 편의시설을 갖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조금의 벌이라도 있는 노동자들은 라면을 사와 끓여먹기도 했다.

기자는 이 곳을 둘러보고 옥상에 올라가 삼각공원의 배식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삼각공원을 벗어나 주변 노점상을 둘러보던 중 한국 일간지와 잡지들을 늘어놓고 파는 교포 아주머니를 만났다.

비록 며칠 지난 신문이지만 적지 않은 양으로 보아, 또 교포 아주머니의 말투로 보아 수요가 많은 듯 했다. 1930년대 이미 한국인(조선인) 노숙자가 등장했고 80년대 후반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국제인력시장이 형성되었다지만 국내 신문이 공수될 정도로 한국인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사진을 찍으려하자 아주머니는 보따리를 싸 도망가려고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되면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3만 명의 일용 노동자,그중에서도 일정한 일자리도 잠자리도 없는 9백여 명의 노숙자. 이들을 어떻게든 보살피겠다는 일념으로 가마가사키에는 9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 6개, 개신교 3개 단체가 「가마가사키 그리스도교협우회」라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각자 고유한 자선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무료 배식, 대 정부 로비, 대외적 홍보, 단주(斷酒) 프로그램 운영, 노인 쉼터 제공, 어린이 교육, 병원 환자 방문, 의복수선, 폐품 수집 등등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예수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여로(旅路)의 집」을 찾았다. 책임자 다까사끼 케이코(안젤라)씨와 봉사자 3명이 있었다. 이들은 비상주 봉사자들과 함께 겨울 밤 노숙지를 돌면서 아픈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고 이들과의 상담을 통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거나 무료 숙소를 알선해주기도 한다.

또한 워낙 유명한 빈민가라 전국에서 찾아 오는 학생들도 많다고 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세미나 등을 마련, 관심을 촉구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도 한다.

시설 운영비는 100%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부 보조금은 없었다.

케이코씨는 노숙자들을 성격적으로 사회적응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단정했다. 물론 정식 직원보다는 일용 노동자 고용이 기업에 유리하고 싸고 편리하다는 사회구조적인 문제 등도 지적했다.

『일용 노동자들에게 제일 큰 문제는 고독이다. 이들은 가정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의욕을 갖고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

결국 당사자인 일용 노동자들이 희망적인 생각이 없다면 변화는 힘들다는 말이다.

케이코씨는 『노숙자들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상황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고 말하고 『단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도 구조적 환경에 의해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돌아갈 가정이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들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노숙 기간이 길어지고 그 삶에 적응되면 머지 않아 일본과 같은 희망 잃은 노숙자들을 양산하게 되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으로 부각될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노숙자문제에 적극 대처할 때이다.

■ 오사카 빈민가 형성의 역사적 배경

1903년 산업박람회 치르면서 빈민가 형성

원폭···도시 전체 폐허 「판자촌 시대」 맞아

30년대 한국인 노숙자ㆍ외국인 노동자 등장

「가마가사키」. 1903년 산업박람회를 치르면서 빈민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30년대 세계공황을 거치면서 노숙자가 증가했고 놀랍게도 한국인(조선인)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끌려가거나 벌이를 위해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오사카 전체가 폐허가 되었고 오갈데 없는 전쟁 피해자들이 가마가사키에 모여 살면서 전형적인 「판자촌 시대」를 맞았다. 이들은 짐꾼, 고물상, 넝마, 노점상, 담배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70년 만국박람회가 오사카에서 열리면서 또 다시 전국에서 노동자가 몰려들게 되고 이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빌딩과 같은 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따라서 독신자 동네가 형성되고 이들은 하루 600~700엔을 내고 하루하루 살아갔다.

1970년대 일본 경제가 최대의 활황기를 맞아 가마가사키에 「노동자 종합선테」가 세워지고 「노동자 복지센터」 「사회 의료센터」 등이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노동자 정책이 펼쳐졌다. 심지어 「직업 안정소」에서 그날 일감을 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당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제1차 석유파동을 맞으면서 가마가사키는 지옥으로 변해간다. 80년대 후반 야쿠자와 경찰의 유착 사건으로 폭동이 발생하고 90년대 거품경제시대가 도래하면서 더욱 황폐해져갔다. 더구나 80년대 후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국제노동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90년대초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가마가사키 지역 노동자의 평균 연령은 52세. 급속도로 고령화되면서 노동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잃어가고 부랑자들이 대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용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이나 종교 단체에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하루 700~800명이 배급으로 연명했다.

일본=신정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