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1> '초원의 사제' 김성현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09-06-24 수정일 2009-06-24 발행일 2009-06-28 제 2654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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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손길로 초원 위에 세워진 성전
10년째 몽골에서 선교활동 중인 김성현 신부가 몽골 종모트에 건립 중인 새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잔고 50달러!’

통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성현 신부(대전교구 몽골 선교사제)는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300명 넘는 몽골 항올본당 식구의 목숨이 달렸다. 당장 주일미사에 오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따뜻한 차와 빵을 살 돈도 부족하다. 밤 열두시를 훌쩍 넘긴 시간, 김 신부는 성당 앞마당 성모동굴 앞에 섰다. 초여름밤의 몽골 하늘, 적막함 속에 별이 빛나고 있다.

‘하느님이 이끌어주시겠지….’

가방을 꾸렸다.

다음날 밤 12시20분,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김 신부, 창문 밖으로 펼쳐진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종모트(몽골 항올본당 관할 3개 공소 중 하나) 새 성전 건립 기금을 비롯한 몽골 선교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한 한국행. 묵을 곳도, 후원금을 모집할 본당도 아무것도 계획된 것이 없다. 그러나 ‘여행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몽골 선교 10년, 초원 위에 교회를 세우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강한 팔을 보았기에 두려움이 없다.

‘야훼이레’

하느님이 모든 걸 마련해 두셨으리라는 김 신부의 생각은 적중했다. 신학교 선배 신부의 초대로 간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1000만원의 후원금이 모인 것이다. 운영조차 어려운 본당 주일미사에 모인 신자라곤 할아버지 할머니 170여 명이 고작, 미사도 한 대 뿐이었다.

“몽골 선교의 열매에 대해 기쁘게 나눴을 뿐인데, 하느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김 신부는 몽골에 왔음을 실감했던 그 날의 일기를 떠올렸다.

#2000년 5월 6일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 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루카 24,35)

오늘 저의 삶의 여정에서도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거센 모래 바람과 형제들과의 대화 안에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였음은 빵을 떼어 주시는 당신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을 보게 하소서. 겸손한 (어떤 이유에서든) 형제들의 미소에서, 속삭임에서, 행동에서 인간의 부족함을 나무라지만 말고, 그 안에서 당신의 빵 떼시는 손길을 보게 하소서. 거칠고 메마른, 모래 바람에 마지막 남은 한 방울마저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은 이 땅을 오늘 보았습니다. 그 모래 바람 사이로 말치기 한 사람이 자신의 말들을 이끌고 묵묵히 행진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무리 한 켠에 말없이 걷고 계시는 모래 바람 속의 주님을 보았나이다. 잊지 않게 하소서.

‘몽골에 온지도 벌써 10년이구나….’

김 신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처음부터 선교사제를 꿈꾸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고 또 동시에 필연이었다.

“살면 살수록 느낍니다. 주님께서 왜 부족한 저를 준비시키시고 이 몽골로 부르셨는지를.”

대전교구 공세리본당 출신인 김 신부는 태어나 자란 곳 외에는 모르던 그 시절, 성당 마당 한켠에 서 있던 초대 주임신부 성일론 드비즈 신부(파리외방전교회)의 공적비를 떠올렸다. ‘저 분은 왜 이 먼 곳까지 오셨던 걸까? 무슨 재미가 있었을까?’ 어린 소년의 머릿속에 떠오르던 궁금증을 지금 항올본당 몽골 어린이들도 김 신부를 보며 가질 것이다. 선교에 대한 생각이 없던 시절 로마에서 유학한 김 신부의 논문 주제는 공교롭게도 ‘교구사제의 외방선교’였다. 김 신부는 몽골선교사 파견 모집 소식을 들은 날을 떠올렸다. 서품을 받고 두 본당에서 보좌로 사목했지만 마음 속에는 늘 구체적인 가난의 실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북한이나 문화권이 비슷한 중국에서의 선교에 대한 어렴풋한 소망이 있어 포클레인과 지게차 자격증을 따두었지만, 몽골로의 선교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설렘에 성당 마당을 서성이던 늦은 저녁, 선선한 바람이 볼에 부딪혔었다.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다. 도청으로부터 27개 군의 거점도시인 종모트 공소의 종교활동 허가를 받기 위해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이 남아 있다. 김 신부가 없는 사이 한인신자 중 한 명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달리했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외벽이 너무 낡아 부서지고 있다. 현대 유목생활의 표본을 만들고자 시작했던 농장과 축사 운영을 놓고 신자들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소 20여 마리가 살고 있는 축사도 수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보고 싶다. 한 달 넘게 자리를 비웠으니 김 신부의 빈 자리가 클 것이다.

“갓난아이를 두고 온 부모의 심정이 이럴 겁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세 번에 걸친 탈장수술로 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 절대적 안정이 필요함에도 바삐 짐을 꾸렸다. 하느님께서는 빈 가방을 가득 채워주셨다. 김 신부는 당당히 신자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10년간 자신을 믿고 몽골 교회를 후원해준 수많은 후원자들에게도 감사했다.

“쌓여있는 후원통장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후원해주신 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버젓한 성전 하나 없이 천막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녁 8시20분, 울란바토르행 비행기, 몽골의 신자들을 다시 만날 생각에 부푼 김 신부의 마음은 이미 몽골에 가 있었다.

■ 몽골의 역사·문화·종교

700여 년의 역사 속에 칭기즈칸의 피가 도도히 흐르는 몽골. 시베리아 남부 초원에서부터 히말라야 산맥, 알타이 산맥, 중국의 만리장성으로 이어져 동쪽의 만주 서부에서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 몽골의 총 면적은 156만㎡로 한반도의 8배에 해당한다. 인구는 약 300만 명, 그 중 35%인 110만 명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시에 살고 있다.

몽골은 라마불교 신자가 90% 이상으로, 불교가 국교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장례나 결혼 문화 등 삶의 곳곳에 라마불교의 영향력이 미친다. 삶의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신을 향한 몸짓을 보였다. 게르(유목민들이 초원 위에 짓는 집)에 등을 밝히거나, 후르뜨(khrud·티벳경전이 들어있는 함.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를 돌렸다. 몽골의 종교 신심은 한국의 가톨릭 신심과 유사점이 있다. 등을 밝히거나, 후르뜨를 돌리는 행위는 마치 촛불을 밝히거나 묵주알을 돌리는 것과 비슷하다. 또 ‘기도를 한다’는 표현이 ‘경전을 읽는다’로 대신될 만큼 ‘말씀’을 중요시 하는 것에서 ‘성경’을 통한 복음 전파의 희망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에서의 선교는 쉽지 않다. 다양한 신을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쉽지만 그분이 천지를 창조한 ‘유일신’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계절마다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들에게는 매 주일 성당을 찾아 미사를 봉헌하는 신앙생활 자체가 익숙지 않다. 몽골 전체를 통틀어 본당 4개, 공소 6개의 작은 공동체,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약 0.02%인 650여 명에 불과하지만 이조차도 기적에 가깝다.

몽골의 초원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