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신문사 사장 재임시절 함께 근무한 이단원씨

정리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9-06-17 수정일 2009-06-17 발행일 2009-06-21 제 2653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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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 성장 배려한 ‘아버지’ 같은 분
교회 현대화 몸소 실천하며 신문사 변혁 시도
아랫사람 고민 털어놓으면 기꺼이 고통 나눠
이단원씨
이단원씨가 소장하고 있는 가톨릭시보사 사장 재직 시절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
누군가를 기억하고 또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와 ‘의지’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다. 더구나 ‘오래도록’이라는 수사가 붙게 되면 그 기억은 개인에게는 추억이 되고 개인을 넘어서면 역사가 되기도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가톨릭신문사 사장 재임시절 함께 근무했던 이단원(다시아나·76·서울 길음동본당)씨에게 2년 남짓 고인과 연결됐던 기억의 끈은 다시 오랜 인연으로 이어져 삶 그 자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기경의 그늘 밑에서 정신뿐 아니라 육체적인 생계를 이어왔다”는 이씨의 고백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의 기억 속 깊숙이 자리한 인간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을 끌어내는 일은 그래서 아름다운 기억과의 재회이자 기록되지 못했던 역사의 재발견이나 다름없다.

# 한 장 사진으로 남았지만

내겐 빛바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 한 장이 있다. 그토록 가슴에 담고 살아온 분이건만 달랑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다니…. 그나마도 김 추기경을 떠나보내고 나서 그분의 흔적을 좇다 어렵게 찾은 것이어서 지금에는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 되고 말았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사)에 재직하시던 시절 신문사 어디에선가 찍은 사진인 듯 싶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수환 추기경은 언제나 만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분이지만 사진 속 그분의 모습은, 서글서글한 눈망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지만 웃음이 없다. 어쩌면 조금은 우수에 젖고 고뇌에 찬 듯한 모습이 언뜻 비치기도 한다.

그랬다. 2년 남짓한 시간, 가톨릭시보사 재직 시절 가까이서 뵀던 그분은 간혹 심각하리만치 웃음이 없으시기도 했다. 왜 그러셨을까. 짐작컨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십자가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기껍게 지시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신의 능력을 돌아보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혼자 계실 때는 늘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지 말 붙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누군가와 말문이 트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분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내 기억으로 그분은 함께하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신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렇기에 가까이서 그분을 체험한 이들이라면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한 분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언행일치의 사표

김수환 신부님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부임해온 것은 1964년 6월, 여름의 문턱을 막 넘어서던 무렵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교수신부님의 추천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61년부터 시보사 기자로 일하고 있던 내게도 새로 온 사장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은 눈길이 쏠릴 만한 것이었다. 그분은 그때까지의 신문사 기풍을 확 바꿔놓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당시 한창 열기를 더해가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목표이기도 했던 교회의 현대화(aggiornamento·아죠르나멘토)를 몸소 실천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당신 스스로도 상당히 진취적이고 현대적인 사고와 행동의 면면을 보이기도 하셨지만, 그런 모습은 신문사의 운영 전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장 가톨릭교회 안으로 한정되다시피 하던 필자를 형제 교회들은 물론 타 종단에까지 개방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셨다. 강원룡 목사, 이상근 목사, 성공회 노대영 신부 등 개신교 저명인사들의 글이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가 하면 비신자들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교회 일각에서는 가톨릭 정신을 흐리게 하는 처사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목소리라면 무방하다는 입장으로 고수하시며 편집방향을 바꾸지 않으셨다. 특히 교회일치를 강조하시며 형제 교회들과의 대화를 일궈내려 애쓰신 면모는 지금 생각해봐도 탁월한 혜안이 바탕이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인간에 밀착된 존재

나는 김 추기경이 신문사에 오실 때까지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분은 그 어떤 강제나 강압도 없으셨다.

늘 온화한 모습으로 모든 신문사 가족들을 대하셨던 그분은 내게 34세의 짧은 생을 불살랐던 영성의 대가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를 직접 소개해주시고 수시로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기관의 대표라는 위치에 계신 분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추기경이 직접 사주신 베이유의 「사랑과 죽음의 팡세」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심취했지만 왜 그분이 하필 베이유를 권하셨는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이 외에도 그분은 틈틈이 묵자 철학을 들려주시는 등 당신 곁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을 배려하시는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이셨다. 나뿐만 아니라 추기경과 잠시라도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그분이 영원히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도 알면 알수록 참 매력적인 분이셨다. 그런 그분의 삶에 매료되어서일까, 나는 누가 떠밀지도 않았는데 당시 교구장 비서였던 이갑수 신부(전 부산교구장)님으로부터 교리교육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됐다.

이렇듯 김 추기경과 함께했던 시보사 재직시절은 내 생애 있어 정신적으로 가장 고양되고 내면적으로 빛나던 때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주위를 빛나게 하는 존재

추기경이 사장으로 오시고 나서 신문에서는 많은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졌다. 독자들과의 쌍방향 소통을 위해 ‘디알로그(대화)’란을 신설하는가 하면 신앙에 대한 의문점을 풀 수 있는 ‘질의 응답’란,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을 독려하기 위한 ‘순교성지를 찾아서’ 등 다양한 기획이 이뤄졌다. 편집과 영업 파트를 모두 합쳐도 10명이 채 안 되는 직원들로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마당이어서 추기경은 사장으로서뿐 아니라 기자와 영업사원 등 1인3역을 자원하셨다.

내게도 ‘반사경’이라는 신설된 칼럼난이 맡겨졌는데, 원고지 5매짜리 난이었지만 늘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추기경께서는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려움을 아시고 아랫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기꺼이 함께 고통을 나누셨다. 한 번은 내가 밤을 새워 이러저런 책을 뒤적인 끝에 근근이 원고를 써서 출근하자 당신께서도 밤새 고민을 하셨는지 씻지도 못한 듯 부스스한 얼굴로 원고를 써오셨다. 그러고는 두 원고를 비교해보시더니 당신이 쓰신 원고를 거리낌 없이 쓰레기통에 던지셨다. 이렇듯 그분은 당신의 노고를 생각지 않으시고 주위를 더욱 빛나게 하시는 분이셨다. 이런 그분의 면면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기쁨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추기경이 1966년 신설된 마산교구장으로 가시고 이어 서울대교구장이 되시고 나서도 신문사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가족들과의 인연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10여 년간의 신문사 생활을 접은 후에도 그분은 이러저런 보이지 않는 도움을 많이 주셨다. 생계가 곤란할 때는 일자리를 찾아주시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어떤 식으로든 위로를 주셨다. 경향잡지를 거쳐 가톨릭출판사, 서울대교구 홍보실 등을 거치며 늘 가까이서 그분을 뵐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분은 내가 편지를 드릴 때마다 어김없이 격려가 담긴 답장으로 힘을 북돋워주셨다. 편지글 속에 가감없이 드러나는 그분의 인간적인 고뇌에 솔직히 놀라기도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추기경의 그런 모습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분을 가까이서 보며 인간이 저토록 위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됐지만, 그것은 그분의 고고함이나 위대함 때문이라기보다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그가 그린 하느님나라

추기경과의 오랜 기억 가운데 시보사 사장으로 계시던 시절 전 직원이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부산에서 목선 한 척을 빌려 닿은 섬 바닷가, 수영복 차림으로 큰 바위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시던 그분이 문득 말했다. “아! 우리가 에덴에 왔구나.”

그는 소박한 밥상을 사랑하고 질박한 만남을 향유했던 분이었다. 그런 삶 속에서 그가 그리고 살아간 하느님나라가 있지 않았을까.

김 추기경이 이단원씨에게 보낸 격려 어린 편지들.

정리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