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3) 구산성지 성 김성우(안토니오)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9-06-09 수정일 2009-06-09 발행일 2009-06-14 제 265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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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마을 교우촌 변모에 공헌
김성우 성인 삼형제 이웃·친척에 선교
모방 신부에 우리 말·조선풍습 가르쳐
2년 옥살이 하다 1841년 교수형 당해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초상화.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옥중 성인의 말씀)

세례명은 안토니오. 축일은 9월 20일.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성우는 그의 자이다. 1795년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 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성인은 만집(萬集), 문집(文集) 등 두 동생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고 삼형제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과 친척들에게 선교했다. 성인 형제들의 노력으로 구산 마을은 교우촌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성인은 1833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현 효제동)과 마장안(현 마장동) 등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그 후 다시 구산으로 돌아온 성인은 자신의 집에 강당을 마련했으며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9년 일어난 기해박해의 여파는 구산에 미쳐 공소 회장이던 성인은 사학의 괴수로 지목돼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그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했고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 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했다. 또 온갖 형벌을 받아내면서 석방될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했다. 배교하라는 재판관의 강요에 성인은 아무런 굽힘없이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안 관장은 결국 1841년 윤 3월 9일(4월 29일) 성인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 때 나이 47세였으며 옥에 갇힌 지 2년이 지난 시기였다. 성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두어져 구산성지에 모셔졌다. 로마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1925년 7월 25일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 구산성지는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쓴 구산성지(www.gusansungji.or.kr,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10 소재)는 김성우 성인과 여덟 명 순교자의 자취가 스민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입구에는 구산성지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모님께 특별한 신심을 가졌던 구산성지 초대 주임 고 길홍균 신부가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 모습을 고 김세중(프란치스코) 화백이 제작한 것이다. 성지 안쪽에는 성당과 김성우 성인의 묘가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수원교구 성지와 교회사를 연구하는 수원교회사연구소도 성지 내에 자리하고 있다.

※순례 문의 031-792-8540 성지 사무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