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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희망입니다] 영·유아 생활시설 ‘해뜨는 집’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9-05-19 수정일 2009-05-19 발행일 2009-05-24 제 264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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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빠’가 있었으면…”
부모는 있지만 양육 힘든 0~2세 유아 무료로 돌봐
주로 이혼한 이주여성들 여력이 생길 때까지 맡겨
‘해뜨는 집’ 외부 모습.
‘해뜨는 집’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잠에서 깨 카메라를 신기한듯 쳐다보고 있다.
서울 가락동 아담한 단독주택. 곤히 잠든 아이들을 깨울까하는 마음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아이구 우리 은총이는 잠도 없네. 친구들은 다 자는데 이렇게 놀자고 보채요.”

서너 명의 봉사자들이 은총이 뒤치다꺼리에 정신이 없다. 기저귀를 갈고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빗기고, 행여 넘어질까 은총이를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한눈 팔 새가 없다.

하나둘 잠에서 깬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방에서 들려온다.

“우리 장미 깼나보네요. 어서 데려오세요. 우유 먹여야겠어요.”

하나둘 봉사자들의 품에 안겨 거실로 나오는 아이들. 버지니아는 혼자 문을 열고 슬금슬금 걸어 나온다. 잠에서 덜 깨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는 모습은 까만 피부색만 다를 뿐 천상 두 살 아기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직영 영?유아 생활시설 ‘해뜨는 집’의 오후가 시작됐다.

모두 거실에 나오자 정신이 없다. 장미와 선미, 은총이, 유현이, 버지니아, 수정이. 낯선 남자를 보자 약속이나 한 듯 울음을 터뜨린다.

“아빠를 본 적 없어 남자가 낯설어서 그래요.”

해뜨는 집 실장 최선이(스텔라)씨가 당황한 기색 역력한 기자에게 설명한다. 울음도 잠시, 카메라가 신기한 듯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카메라를 만진다.

여섯 아이들. 엄마는 있지만 아빠 품에 안겨 본적은 없다. 엄마도 일주일에 한 번 반나절만 만날 수 있다. 한창 엄마아빠 품에서 옹알이하며 자라야 할 아기들이지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장미와 선미, 은총이 엄마는 베트남에서 온 국제결혼 여성. 모두 한국인 남편과의 불화로 집에서 나오거나 쫓겨났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고 걸핏하면 때리는 남편과는 도저히 살 수 없어 집을 나왔지만 막상 아기를 키우기 막막했다. 돈을 벌어야 아기를 키우는데 두 살도 채 안 된 아기를 맡길 곳도 없었다. 아기와 함께 한 달 넘게 모텔을 전전한 엄마도 있었다. 서울 왕십리 재봉공장에서 일하며 10만원짜리 단칸방에 사는 엄마들은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아기를 보러 온다.

수정이 엄마도 마찬가지. 몽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엄마는 국밥집에서 일한다. 한국인 남편과는 헤어졌다. 올 1월 태어난 수정이는 한창 엄마의 사랑이 필요할 4개월째 되던 5월 해뜨는 집에 왔다. 수정이 엄마는 식당에서 먹고자며 생활한다. 일이 너무 바빠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아기를 보러 온다. 어떤 엄마가 아기와 떨어지고 싶을까. 수정이 엄마가 겪었을 아픔을 우유 달라고 보채며 우는 수정이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다.

유난히 눈에 띄는 버지니아의 엄마는 우간다 난민이다. 아빠도 아프리카 사람이지만 한국에는 없다. 난민 신분으로 입국한 엄마는 아기를 맡길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해뜨는 집’까지 오게 됐다.

올 12월이면 꼭 10년째.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1999년 문을 연 해뜨는 집은 엄마 또는 부모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정상 일시 보호를 필요로 하는 0~2세 아이들의 무료 생활시설이다. 경제형편이 어려운 한국인 아이도 있지만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나 미혼모 가정 영유아가 대부분이다. 99년부터 현재까지 해뜨는 집에서 생활하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들은 70여명이다.

아이 엄마들은 대부분 이주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장이나 식당에서 일한다. 주중에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탓에 아이를 볼 수 없어 일요일, 그것도 네 시간 정도만 아이를 만나러 해뜨는 집을 찾는다.

“일요일에는 아기 끌어안고 눈물만 흘리는 엄마들이 많아요. 어떤 엄마가 피붙이 떼어놓고 살 수 있겠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지금은 열심히 일해서 아기 데려갈 생각만 하라고 충고하며 아이와 떼어놓죠.”

최씨는 매 주일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하는 엄마들을 보낼 때가 가장 마음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마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아이를 키울 여력이 되면 데려간다는 것.(해뜨는 집은 2살이 될 때까지만 아이들을 돌본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고 전화도 하고 주말에는 해뜨는 집을 찾아와 일손을 돕는 엄마들도 있어 보람을 갖는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부터 엄마의 손길이 꼭 필요한 영·유아들을 돌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도 24시간 내내 돌봐야 하는 고된 일이다. 해뜨는 집을 찾는 많은 자원봉사 엄마들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해뜨는 집을 찾는 봉사자들은 이곳에서 2시간씩 아이들을 돌본다. 기저귀도 갈아주고 우유도 먹이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이다. 말이 자원봉사지 아이들을 돌보려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이곳을 설립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고 운영도 맡았던 서울 가락동본당(주임 박노헌 신부) 신자들을 위주로 인근 본당과 개신교회, 단체에서도 자원봉사를 온다. 대부분 주부들인 자원봉사자들이 가사에 바쁜 오후 6시부터 8시까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이날 해뜨는 집을 찾은 가락동본당 레지오 ‘공경하올 쁘레시디움’ 단원 세 명도 잠에서 깬 아이들 기저귀를 갈고 빨래를 내다 너느라 2시간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한 봉사자는 “흐린 날씨에 기분이 우울하다가도 이곳에 와서 아이들 밝은 웃음을 보면 피로도 가시고 보람도 찾는다”고 말한다. 손자 손녀 대하는 느낌 아니겠냐는 물음에 ‘아직 엄마 나이’라고 웃는 봉사자들은 20년 전 기저귀 갈 때 실력은 아직 여전하다고 말한다.

야간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직원 두 명 인건비 정도만 지원 받을 뿐 무료 생활시설인 해뜨는 집의 운영은 모두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1000원, 5000원씩 매달 후원금을 보내오는 은인도 있고 개신교회와 인근 단체에서도 기저귀와 분유, 과일 등을 전해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후원이 줄어들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불황 때문이다. 한둘 키우기도 버거운 시기인데 여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 분유나 기저귀 값을 대기에는 해뜨는 집의 힘이 벅차다.

최씨는 “먹고 살 정도는 되니깐 지금까지는 괜찮다”고 이야기하지만 말 끝머리에는 앞으로 후원자가 더 줄면 운영이 어렵지 않겠냐는 뜻도 담고 있는 듯하다.

해뜨는 집을 나서는 길. 사진을 찍기 위해 대문을 나서다 잠시 돌아섰는데 현관문 유리 사이로 한 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은총이다. 베트남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영락없는 한국 아이의 얼굴. 유독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던 은총이가 손을 흔든다. 1시간 여 함께 앉아있었을 뿐인데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리던 은총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이곳에 와 1년3개월째 해뜨는 집에 살고 있는 은총이에게 아빠의 사랑을 보내줄 은인들이 절실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수많은 은총이가 있다.

은총이에게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희망은 은총이와 함께 살아갈 바로 우리다.

◆ 후원을 기다립니다

서울 가락동본당이 한 독지가의 도움과 신자들의 정성으로 아동복지원 형태로 개원한 ‘해뜨는 집’은 현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가 직영하는 영·유아 생활시설입니다. 아동복지시설은 많지만 해뜨는 집처럼 영·유아를 1, 2년 정도 단기로 보호하는 시설은 드문 형편입니다. 24시간 아이들을 돌보는 게 쉽지 않고 위험도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맡기는 부모들 대부분의 형편도 어려워 시설을 유료로 전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름 그대로 해뜨는 집에 밝은 해가 떠 아이들의 얼굴에 밝고 환한 웃음이 가득차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자원봉사 및 후원 문의 02-727-2257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자원개발팀, 02-423-2303 해뜨는 집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101-087283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모금된 금액은 해뜨는 집을 비롯해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진행하는 소규모 시설 지원 사업에 사용됩니다.

‘해뜨는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이 봉사자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