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2) 요당리성지 장주기 요셉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9-05-12 수정일 2009-05-12 발행일 2009-05-17 제 264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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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봉사로 신학생 물심양면 도와
장주기 요셉 성인의 초상화.
장주기 요셉 성인은 1803년 수원 양간(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1827년경 신심이 두터운 형수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학식이 있고 슬기로우며 신심이 두터운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20여 년간 회장으로 일한 성인은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성인은 1845년경 박해를 피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이사해 살았다. 1856년 베르뇌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제공하고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와 신학교 관리직을 맡았다. 성인은 부인과 마음을 모아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신학교에 봉헌했고, 청빈과 봉사의 삶으로 11년 동안 신학교 살림도 도맡았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체포됐지만 성인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석방시켜 달라 청해 성인은 하는 수 없이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제천 관장은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했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묻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짚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했는데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 전해진다.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은 성인은 왕비의 해산 달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는 조정의 결정에 따라 충남 보령 수영으로 끌려갔고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 요당리성지는

요당리성지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를 통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이고, 장주기 요셉 성인과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는 장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다. 이곳 출신 순교자로는 지타대오, 림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홍원여(가를로)와 장주기 성인의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성지는 또한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과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요당리성지는 한국 교회 순교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긴 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6년 9월 성지 전담 사제를 파견해 성지개발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성지에는 대형십자가와 성인 묘지, 기도의 광장, 묵주기도 길,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돼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해 3월 성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간 성지는 1년 3개월간의 공사를 마치고 6월 4일 오전 11시 평택대리구장 조원규 신부 주례로 신축성당 입당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 순례문의 031-353-9725, 홈페이지(www.yodangshrine.kr)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