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추기경]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도요안 신부

임양미 기자
입력일 2009-04-29 수정일 2009-04-29 발행일 2009-05-03 제 264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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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없는 노동자들을 온 몸으로 사랑한 분”
1996년 노동사목위원회 설립 25주년 기념행사에서 김수환 추기경(가운데)과 도요안 신부(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관계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외국인 사목 담당 도요안 신부.
5월 1일 노동절, 김수환 추기경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은 힘없는 노동자들을 온 몸으로 사랑했던 그 분의 헌신 때문일 것이다. 1968년의 강화도사건부터 시작해 1971년 전태일분신사건, 1978년 동일방직사건, 1982년 원풍모방사건 등 수많은 노동분쟁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그분은 늘 약자의 편에서 진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런 김수환 추기경 옆에는 도요안 신부가 있었다.

1937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존 F. 트리솔리니(John F. Trisolini)는 1959년에 한국으로 왔다. 스물두 살의 이 청년은 이후 살레시오회 신부가 돼 한국에서 ‘도요안’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생애를 한국에 살며 노동자들의 든든한 아버지가 됐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둠속으로 내몰려야 했던 70~80년대, 도요안 신부는 희망의 등대지기 김수환 추기경님을 충실히 따랐던 착한 종이었으며, 좋은 벗이었다.

# “도 신부, 노동사목위 좀 맡아주게”

그 분을 처음 뵌 것은 1968년에 마산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서울교구장으로 착좌하실 때였습니다. 그 땐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봤을 뿐이죠. 그때는 제가 도림동본당(서울시 영등포구) 보좌신부로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도림동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어요. 어느 날 김 추기경님께서 도림동본당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께서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에 대해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 서울과 근교의 도시에는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약자였지요.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70~80년대에는 강화도사건(1968년)이나 동일방직사건(1978년), 원풍모방사건(1982년) 등 노동분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1970년에는 영등포지역에 김진수라는 젊은 노동자가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됐습니다. 1971년에는 전태일이 의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뜻으로 분신했고요. 그 때 김 추기경님은 성모병원을 통해 전태일의 치료를 도우셨습니다. 김 추기경은 그 사건을 계기로 노동문제에 적극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셨습니다. 노동자 현장 교육에 적극 투신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사제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하셨습니다.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셔서 “도 신부, 노동자를 위한 도시산업사목연구회를 꾸리려고 하네. 자네도 함께 해 주게”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러겠다고 했지요. 얼마 후 위원회가 조직됐는데,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위원회를 꾸리는 사제 12명 가운데 저 혼자만 수도회 소속이었고, 또 외국인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위원장까지 맡게 됐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이러저러한 얘기를 솔직하게 전해 드린 것 밖에 없는데, 저를 전폭적으로 신뢰해 주셨습니다.

# 라면 두 그릇

이후 추기경님을 더욱 자주 만나게 됐습니다. 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셨습니다. 노동자에 관한 사건이나 사고가 터지기만 하면 저를 불러 이야기하길 원하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미 돌아가신 박영기 교수님이나 김말룡 선생님같은 교회의 노동문제 전문가들이나 다른 사목자들의 이야기에도 늘 귀를 기울이셨지요. 당시에는 도청의 위험이 있었고 늘 감시가 따랐기 때문에, 추기경님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주로 낮 시간을 이용했습니다. 어느 날, 추기경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어떤 일에 대해서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노동 실태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그만 밥 먹을 시간을 놓쳐버린 적이 있어요. 그 때 추기경님께서는 아래층 주방에 전화해 라면 두 그릇을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추기경님과 라면을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밥 먹는 시간도 잊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신 분, 라면을 먹어가면서까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눈 분, 그분은 그렇게 소박하신 분이었습니다.

#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1997년, 저는 60세를 맞이해 회갑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날은 저의 어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이 6월 25일이었는데, 당시 김 추기경님께서는 임진각에서 평화의 미사를 집전하는 날이었습니다. 미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추기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김 추기경님께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가 갈 때까지 미사를 시작하지 말고 10~15분 정도만 늦춰달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회갑미사를 함께 봉헌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새벽같이 임진각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또 저의 회갑미사가 뭐라고 다시 서울까지 바람처럼 달려오신단 말입니까. 저는 그분의 마음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미사는 미뤄졌고 결국 김 추기경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정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 새벽같이 달려오신 분

2004년 7월, 저는 척추 암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척추의 일부 뼈를 드러내고 이식하는 큰 수술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우두커니 누워있는데, 수술한 바로 다음날 새벽, 김 추기경님이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추기경님이 저의 첫 문병객이었습니다. “도 신부 괜찮나?” 그 새벽, 어둠을 가르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김 추기경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분은 그렇게 자신의 양떼를 끝까지 돌보는 착한 목자였습니다.

# 말없는 포옹

한 번은 김 추기경님께서 베트남 공동체와 함께 노동사목회관 강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날 많은 베트남 신자들이 함께 했지요. 그 중 두 딸을 모두 한국남자와 결혼시킨 베트남 할머니가 미사에 참례하셨어요. 두 사위는 모두 노동자들이었고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그 할머니 얘기를 들으시더니 말없이 할머니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겁니다. 그러더니 말씀하셨어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소중한 두 딸들을 한국남자에게 보내줘서 고맙습니다.” 그 분은 진정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 마음은 늘 어려운 이들, 소외된 이들, 몸과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한없이 열려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없는 포옹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미안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해마다 열리는 이주노동자축제미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는 아픔과 어려움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미사 중에 추기경님은 이주노동자들을 축복해 주시면서 “3D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고 부당한 행위를 하는 일부 기업주들의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대우 때문에 고통 받는 여러분에게 한국인들을 대신해 사과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다른 사람의 잘못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 탓이오’라고 외치는 분이셨습니다.

# “그 분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은혜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제가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마치 제가 김 추기경님과 굉장한 친분이라도 있는 듯이 비춰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그분의 친구도 아니었고, 그분과 동등한 입장에서 일을 하는 동료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그분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김 추기경님께서 저에게 보여 주신 모습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저를 정말 친구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항상 저를 인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믿어주고 지지해 주셨습니다.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와,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저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마음을 나눠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했으며 국적을 따지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을 하느님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셨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분이 계셨기에 한국 교회는 70~80년대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 은혜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임양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