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추기경] 조카 김병기씨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4-21 수정일 2009-04-21 발행일 2009-04-26 제 264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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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화목·우애 강조하신 말씀 기억해”
일부러 가족에게는 무뚝뚝하게 대했지만
그 누구보다 따듯하고 인정 넘치셨던 분
김수환 추기경의 친조카들이 2001년 5월 추기경의 80세 생일을 맞아 대전의 한 연회장에서 산수연을 마련했다.
김병기씨 부부와 자녀들이 김 추기경의 생일날 혜화동 주교관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공식 추모기간이 끝난 4월 초, 친조카 김병기(베드로)씨는 김 추기경이 태어나 사목자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딘 대구 남산동과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 주교로서 처음 사목활동을 시작한 마산 등지를 방문했다. 김 추기경과 한집에서 자랐던 김씨는 조카들 중에서도 유독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5남3녀(재적등본 상 4남3녀) 중 막내였다. 결혼한 형과 누나의 자녀들은 김 추기경에게 그 누구보다 귀한 가족들이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 추기경과 같은 세례명을 가졌던 셋째 형 김필수씨. 김필수씨의 3남2녀 자녀들은 현재 김씨 집안의 유일한 친조카들이다. 때문에 김씨는 이미 선종한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촌수가 좀 먼 외가쪽 조카들과 손자·손녀들을 포함, 유족 대표로서 장례·추모기간을 보냈다.

김 추기경의 친조카들은 김 추기경 생전에는 물론, 장례와 추모기간 중 언론에 일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행여 ‘작은아버지’께 누가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평소 김 추기경은 환한 웃음과 따스한 악수, 나직하면서도 소탈한 대화로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김 추기경을 ‘추기경’이 아닌 ‘작은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왕할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던 이들의 기억에는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는 다소 엄격한 김 추기경의 모습이 남아 있다. 단지 김 추기경은 어린 증손자·손녀들에게만은 아낌없는 애정표현을 했고, 그들도 스스럼없이 ‘왕할아버지’ 곁에서 재롱을 부렸다고.

김 추기경의 큰조카며느리인 이현구(안젤라, 김필수씨의 장남인 김병호씨의 아내)씨는 “작은아버님은 가족들과의 관계 안에서는 어떠한 사소한 부탁조차도 들어주시지 않는 단호한 면을 지니셨지만, 내적으로는 친정아버님 이상으로 마음 깊은 애정과 기도를 선물해주신 분이셨고, 항상 형제들간에 우애 있게 지낼 것을 당부한 집안의 어른이셨다”고 전한다. 이러한 김 추기경의 면모는 친조카 김씨의 회고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작은아버지(김수환 추기경)에게 딱 한 번, 회초리를 맞았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제가 형과 싸우고 있었어요. 방학을 맞아 집에 오신 작은아버지는 형제간의 싸움은 안 된다며 따끔하게 혼을 내셨지요. 그 이후로도 기회가 될 때면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어요.

신학교 방학이 되어 큰작은아버지(김동한 신부)와 작은아버지가 집으로 오실 때면 할머니께서는 평소 먹어보기 힘든 고기 등을 정성껏 차려내려 애쓰셨던 모습도 생생합니다. 당시 이갑수 주교님도 방학이 시작될 때면 저희 집에 들러 머물다 가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방학 때만 겨우 만날 수 있는 작은 아버지가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징집 되셨을 때는 온 집안이 그야말로 울음바다였어요. 할머니는 정말 가슴아파하셨죠. 그때 대구 성모당에서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은 신문 등에도 많이 나왔었는데요, 앞줄에 손을 모으고 서있는 꼬마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사제품을 받으신 이후 기억에도 작은아버지는 엄격하고 또 조금은 무뚝뚝한 모습으로 남아있네요. 안동본당 주임으로 계실 때 진주에 살던 제가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당시 지리산 인근에서는 공비가 나타나곤 해서 삼랑진 방향으로 기차를 타고 먼 길을 돌아 안동으로 가야했거든요. 하루하고도 반나절의 시간이 더 걸려 어렵사리 안동에 도착한 저를 보고 작은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왔냐’ 한마디였습니다.

해마다 1월 2일이면 저희 형제자매들과 아이들은 작은아버지께 세배를 드리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대개 세배가 끝나면 덕담도 안하시고 ‘끝났니? 그만 가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도 늘 눈치가 보여 비서수녀님께서 주신 차도 허겁지겁 마시고 일어나야 했지요. 우리들이야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며느리들 입장에서는 ‘작은아버지께 뭘 달라고 온 것도 아닌데 섭섭하다’며 마음 상해할 정도였지요. 어느 해인가, 한마디 덕담도 안해주시는 작은아버지 모습이 섭섭했는지 집사람(문정자 데레사)이 작은아버지에게 한 말씀을 부탁했습니다. 엄마 마음에는 그래도 추기경님의 말씀이니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했지요. 작은아버지는 그러고도 별말씀이 없으셨는데, 우리가 문 앞에 나서자 아이들의 어깨를 뒤에서 안아주시며 ‘정직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목소리와 말씀은 큰 선물이 되어 잊히지가 않아요.

작은아버지와 ‘친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뵈면 그야말로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더군요. 작은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이들은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사연을 통해 끈끈하게 맺어진 분들이었습니다. 저희는 혈육일 뿐이지만 그분들은 모두 사랑으로 맺어진 소중한 분들이라는 것을 이번 장례기간 동안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작은아버지의 그 따스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평소 긴 말씀을 안하시는 작은아버지였지만, 아픈 가족들은 그 누구보다 따스하게 찾아봐 주셨어요. 형(김병호 바르톨로메오)과 여동생(김정자 마리아)이 큰 병으로 선종했는데 작은아버지는 ‘나보다 먼저가는 자식이 어디 있냐’며 애석해 하셨어요. 동생은 미혼으로 지내다 선종해서 빈소를 찾는 이들이 많이 없었는데, 작은아버지께서 손수 ‘정자야 하느님 앞에 잘 가거라’고 쓴 리본을 달아 화환을 보내주셨어요.

큰아버지가 신부님이고 작은아버지가 추기경님인 것이 별 부담이 될 일도 아니었지만, 활동에는 제약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의 가족으로서 드러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습관이 들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본당에서조차 활동을 못하겠더라고요. 한 번은 본당 사목회장을 맡았었는데, 새 성당 봉헌식을 집전하러 오신 작은아버지를 보시고 사람들이 뒤에서 ‘우리 본당 회장이 추기경님 조카잖아’라고 수군대는 말을 듣고, 이후론 어떤 본당에서도 사목회 활동을 하지 않게 됐어요. 한 번도 저희 형제들 입으로 ‘추기경 조카’라는 말을 해본 적도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부탁할 일들을 들고 올 때면 중간에서 거절하는 것도 힘들었고, 행여 사람들이 다른 시각으로 볼까봐 봉사활동조차 맘대로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론 작은아버지 덕을 본 일도 없지요.

하지만 저는 학창 시절, 작은아버지의 덕을 본 일이 딱 한번 있었습니다. 작은아버지가 대구대교구 최덕홍 주교님의 비서를 하실 때였는데요, 당시 대구 대건고등학교는 건물도 없이 천막을 치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작은아버지는 미군부대를 돌며 시멘트와 벽돌 등을 얻어 작은 건물을 짓는데 큰 공헌을 하셨어요. 그러자 학교 측에서 저에게 ‘김신부가 건물을 지었으니, 그 조카에게는 등록금을 안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당시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작은아버지가 많은 일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작은아버지에게 세배 드린 후 식사도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아버님 선종 이후였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가 가장 큰 어른이 되시자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가족에 대한 작은아버지의 사랑은 모두 증손자·손녀들에게 모두 나타난 것 같아요. 작은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을 대하는 것과 달리 평소에도 증손자·손녀들이 보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작은아버지를 돌보시던 간병인 말씀이 입원 중에 작은아버지를 환히 웃게 한 이는 이해인 수녀님과 우리 손녀들이라더군요.

성직자 집안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 받은 영적 선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작은아버지는 평소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어떠한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른들이면 으레 하는 신학교를 가라는 말씀도 안하셨지요. 단지 손자·손녀들에게는 아이들을 많이 낳으라는 당부는 잊지 않으셨어요. 자녀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고 또 의무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어요. 임신한 자녀에게는 항상 강복을 주시며 격려해주셨지요.

작은아버지의 큰 기도보따리는 저희들에게 그 무엇보다 큰 선물로 남겨져 있습니다.

특히 작은아버지가 선종하신 후 장례와 추모기간에는 물론이고 입원 중에도 저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성어린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저희들이야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 한 것이지만, 그분들은 혈육보다 더 큰 사랑과 따스함으로 감동을 주셨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그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오래토록 지속되길 바랍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