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이 땅에 빛을] (9) 말씀을 위해 살던 궁녀·농부·상인들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04-15 수정일 2009-04-15 발행일 2009-04-19 제 264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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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삶, 믿음만은 하나
궁녀로 생활하다가 궁 안에 삼엄한 치안·경계로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렵게 되자 궁을 떠났던 전경협 성녀(탁희성 작). 체포 후에는 궁녀였다는 이유로 더욱 모진 형벌을 받다가 참수형을 당햇다.
최양업 신부가 입국한 후 신부의 복사일을 맡았던 조화서 성인(탁희성 작). 조화서 성인과 그의 아들 조윤호는 부자가 모두 농부였으나 땅을 버릴 지언정 믿음을 버리지는 못했고, 결국 함께 순교했다.
1839년 체포됐으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던 전장운 성인(탁희성 작). 그는 후에 배교한 것을 깊이 뉘우쳤고, 목판인쇄로 교회 서적을 만드는 일을 했다. 1866년 교회 서적이 적발되어 체포됏다.
103위 성인들의 모습을 보면 힘든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숙이 박힌 조선이라는 나라는 물론 자신들의 직업과 상황이 더욱 그들을 옥좼던 것이다.

그들은 편안한 궁중 안에서도, 땀 흘려 일해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풍요롭게 살 수 있었어도 모든 것을 마다하고 주님 품에 잠들었다. 한국의 103위 성인이 오늘날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이유다.

▧ 궁중의 여인들

당시 궁궐의 치안과 경계는 삼엄했다. 모든 것에서 차단돼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알고 ‘믿음’을 지켜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궁궐 안에서도 믿음은 자라났다.

김 율리에타, 전경협(아가타), 박희순(루치아) 성인이 바로 그들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궁녀로 뽑혔던 그들은 궁중에서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어려움에 맞닥뜨린다.

▲ 동정궁녀로 순교한 박희순(2009년 3월 29일자 소개)을 따라 입교, 박희순이 신앙생활을 위해 궁을 나오게 되자 함께 궁을 떠났던 전경협 성인.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머물던 1839년 4월, 포졸들의 습격으로 그는 박희순, 박 큰아기 등과 함께 체포됐다.

이 때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은 그는 모든 고난을 참아내고 5개월의 옥살이 끝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한다.

▲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 율리에타는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부모는 냉담했으나 김율리에타는 홀로 서울에 남아 궁녀로 뽑혀 10년 간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 궁을 떠났고,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품삯을 모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늘 언행을 조심해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1839년 7월 체포, 혹형과 고문을 받고 9월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한다.

▧ 땀 흘리며 살던 농부들

103위 성인 중에는 땀 흘리며 살던 ‘농부’들도 있었다. 농부의 몸으로 하느님을 알고 믿음의 씨앗을 열매로 맺었다.

▲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하던 이명서 베드로는 전주 성지동에 정착, 1866년 12월 동료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돼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병자였기 때문에 관장은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해 가장 먼저 신문하고 고문했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 순교를 준비해나갔다. 12월 숲정이에서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 일을 맡았던 조화서 베드로는 ▲ 아들 조윤호 요셉과 함께 순교했다. 부자가 모두 농부였는데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돼 전주 감영에 갇혔다. 부자는 서로 옥에서 힘이 되며 순교를 다짐하고 격려했다. 조윤호는 아버지가 52세의 나이로 숲정이에서 동료들과 참수형을 받은 열흘 뒤 곤장 16대를 맞고 참수, 19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따라서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한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와 아버지 조화서, 아들 조윤호 등 가문의 3대가 함께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 이밖에도 지극한 효성으로 노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며 결국 순교를 다짐했던 정원지 베드로(숲정이 순교) ▲안 주교가 체포된 뒤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으러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돼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던 손자선 토마스(공주 순교)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좇는 ‘농부’였다.

▧ 돈을 버리고 신앙을 산 상인들

당시 상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알뜰하게 돈을 모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던 상인들은 ‘돈’을 버리고 ‘신앙’을 얻었다. 그리고 참 행복을 알았다.

▲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고문을 참지 못하고 배교했던 전장운 요한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다.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던 그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1866년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해 최형, 임치화를 도와 판각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으나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회서적이 적발되는 바람에 체포된다.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의 나이로 참수당한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박후재 요한은 물장사를 하는 노모를 도와 짚신과 미투리를 팔아 생활했고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도 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돼 치도곤 40대를 맞았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흘렀으나 동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죄수들에게 천주교의 도리를 강론한다. 9월 3일 다섯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 태중교우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 어머니마저 여읜 권득인 베드로는 성패와 성물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고 밝을 때까지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했다.

1839년 아내, 처남, 어린 자녀 등 4명의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이후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보낸다.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서소문 밖 형장에서 35세의 나이로 참수된다.

▲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을 하던 할아버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했던 정국보 프로타시오. 그는 선공감(線工監)에서 ‘공인’으로 일하며 미천하게 살다가 30세쯤 천주교를 알게 돼 입교한다.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고 홍살문 근처에서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체포됐는데 포청의 형벌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했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를 뉘우치고 다시 체포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5월 12일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5월 20일 포청에서 곤장 25대를 맞고 다음날 새벽,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