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추기경] 손인숙 수녀(성심수녀회)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4-14 수정일 2009-04-14 발행일 2009-04-19 제 264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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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있을 때 언제나 달려와주던 아버지”
갈 곳 잃은 이들 명동 성당에 머무르도록 배려
철거민 인권 보호에 커다란 버팀목 돼주신 분
“강제 철거 소식 듣고 식사 중에 뛰어오셨어요”
김수환 추기경이 1986년 12월 24일 상계동 철거민들과의 성탄 미사에서 강론을 하고 있다.
손인숙 수녀는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하며 ‘늘 함께 계셔주시는 모습’, 그것만큼 힘이 된 것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지금 집안에 사람이 있는데, 그 집을 마구잡이로 부숴요. 추기경님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지금 견진성사 주러 나와 있는데,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게.”

1986년, 손인숙 수녀(성심수녀회)는 수시로 김수환 추기경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든든한 아버지의 ‘빽’에 한 가닥 기대를 거는 아이와 같은 심정이었다.

사람이 있는 집을 포클레인으로 찍어 누르는 땅주인과 건설업자들의 무지막지한 폭력, 그 폭력을 수수방관하고 한 술 더 떠 거들어주는 경찰들, 힘없이 울부짖는 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1986년, 정부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환경 정비를 명목으로 서울 상계동 재개발에 들어갔다. 당시의 상계동 철거민 저항은 우리나라 정치·경제·환경의 변화와 주택 정책 전개 과정,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큰 상징으로 남아 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이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하늘나라에 가면 혼날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자신이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는 말에, 자신을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그들 곁으로 달려갔다.

손인숙 수녀는 강원도 사북·고한 탄광촌에 이어 서울 상계동 지역주민들 곁에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손수녀 기억 속 김 추기경은 어려움에 허덕일 때는 언제 어느 때나 달려와주는 아버지였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오랜 기간 나를 만나기만 하면 ‘피켓 드는 사람’ ‘피켓 드는 수녀’라고 부르며 놀리곤 하셨다.

처음 만남 이후 김 추기경님과 나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항상 사회적 이슈를 가운데 놓고 대화를 해왔다. 그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10월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정권이 시작된 때였다. 어느 날 명동성당에서 저녁미사를 봉헌하고 나오다가 학생 시위대와 마주쳐 나도 시위에 동참하게 됐다.

그때 김 추기경님은 이탈리아 로마에 출장을 가셔서 명동에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추기경님이 돌아오신 후 인근 경찰서 고위 간부가 추기경님을 찾아가 지난주 시위 때 맨 앞줄에 서 있던 수녀를 찾아달라고 했단다. 다른 수녀의 소개로 내가 맨 앞줄에서 피켓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추기경님은 이후로 나를 볼 때마다 농담처럼 피켓을 운운하며 웃으셨다.

1970년 이후 우리 수도회는 특히 제도교육 사각지대에 있는 가난한 이들의 현장 교육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수도회가 서울 도시빈민지역 중 한곳에 수도자를 파견하려는데 당시 김 추기경님이 관구장님께 상계동을 추천해 주셨다. 1982년, 나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가 본당사목을 맡고 있던 상계동본당 수녀로 파견돼 지역사회사목에 동참했다. 추기경님은 당시 상계동본당 주임이었던 지베드로 신부님께도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는 수도자가 파견돼 지역사회사목을 도와야 한다고 성심수녀회 활동을 배려해달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이후 나는 상계동 지역에서 살면서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한 이들이 있거나 하면 추기경님께 무조건 도움을 청하곤 했다. 김 추기경님이 항상 우리를 지켜봐주고 계신다는 것이 든든했다. 그러던 1986년, 강제 철거 사태가 발발했다. 내심 김추기경님의 ‘빽’을 믿고 철거 반대 주민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수많은 일 중에서도 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어느 주일, 대낮에 건설업자들이 사람이 있는 집을 마구잡이로 부수기 시작했다. 추기경님께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더니 김 추기경님께서 한 본당에 견진성사를 주러 나가 계셨다. 본당으로 연결하자 추기경님께서는 식사중이셨는데 무조건 ‘금방 갈게’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때 추기경님이 상계동으로 오시자 경찰서장 등이 추기경님이 이 지역에 오시는데 왜 자기들에게 연락을 안했냐며 야단을 하며 모여들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던 것은 추기경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지역주민들을 막고 서 있던 전·의경들이 일제히 철거하는 이들 쪽으로 방패를 돌리고 그들을 막고 서는 것이었다.

철거가 막바지에 이르던 때, 성탄을 앞두고 있었다. 추기경님은 성탄전야미사를 상계동에서 하시겠다고 연락을 주셨다. 그런데 그날 오후, 미사를 위해 단장한 천막 등을 건설업자들이 모두 부수고 사람들이 모이지도 못하게 구덩이까지 파는 것이 아닌가. 난리 통에 전례도구들도 대부분 분실됐다.

너무나 황당해 추기경님께 천막도 다 부서지고 장소도 엉망이라 당일 미사 봉헌이 어렵겠다고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그래도 오시겠다며, 야외 어느 귀퉁이라도 좋으니 미사를 봉헌하자고 하셨다. 전례도구도 모두 챙겨 오시겠다며 걱정 말라고 위로해주셨다. 이 사건으로 일반 언론 기자들도 건설업자 등이 저지른 만행의 결과를 한눈에 보게 되는 이득 아닌 이득도 얻었다.

김 추기경님의 배려는 이후 명동성당에서 더욱 눈물겹게 이어졌다.

마지막 집까지 헐리고 갈 곳이 없어진 상계동 주민들은 고민을 거듭하다 명동으로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장 갈 곳이 없어 어디든 앉을 자리라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그날은 성목요일이었다. 나는 행여 경찰들이 몰려와 우리를 끌어내지나 않을까, 추기경님을 비롯해 교구청 신부님들이 주민들을 내쫓지는 않을까 불안을 계속 안고 있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님은 상계동 주민들을 그날 발씻김예식에 초대해 직접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무언의 격려를 보내주셨다.

이튿날부터 철거민들은 명동성당 아래에 천막을 두개 쳐서 1년여 간의 노숙을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서울대교구측과 명동 주민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명동성당의 전기와 물을 온종일 끌어다 쓰고, 취사도구며 빨래거리가 매일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모습이 결코 보기 좋진 않았으리라.

교회가 상계동 주민들을 도운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자의식을 갖추고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힘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주민들도 정부와의 대립을 통해 돈이나 좋은 집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상계동 주민들은 민주화에도 한몫을 하게 됐다. 1987년 6·10민중항쟁 때 서울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도심 시위대가 경찰 진압작전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밀려 올라왔다. 5일간 이어진 격렬한 대립 속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시위대를 지원했던 이들은 주교관 아래 천막을 치고 살던 70여명의 상계동 철거민들과 수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시위대에게 밥과 라면, 물 등도 부지런히 지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잘 알려진 것처럼 김 추기경님은 당시 정부 관계자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면서 민주화의 열의를 보이셨다. 이후 김 추기경님은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상계동 주민들이 갈 곳을 찾을 때까지 명동에 머무르게 허락해 주셔서, 성직·수도자들이 철거민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활동에 나서는데도 큰 힘이 됐다.

김 추기경님과 함께한 시간들은 모두 사회적 이슈의 현장에 직접 나와 주신 덕분에 엮어졌다. ‘늘 함께 계셔주시는 모습’. 그것만큼 힘이 된 것이 없었다. 특히 추기경님은 “일반적인 사회복지는 지금 당장 밥을 굶는 이들과 추위에 떠는 이들을 돕는 일시적인 방편”이라며 “우리는 그들의 인권과 정의가 짓밟히지 않도록 예방하고 사회적 제도를 갖추도록 노력하는데 더욱 힘써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현재 용산철거 참사를 보면서 추기경님이 강조하셨던 그 뜻이 새삼 절감된다.

정리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