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월간 ‘레지오 마리애 편집장’ 박광호 신앙수기] 내영혼 쉴데없는 길섶에 (13) 제13장 세상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입력일 2001-09-09 수정일 2001-09-09 발행일 2001-09-09 제 226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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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내가 아버님을 모시게 되었다. 
아버님회사가 부도 처리되고, 그 때문에 친지들 집을 전전하신다는 말을 듣고 죽을 먹더라도 내가 모셔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최양업 신부가 박해 때 숨어 지낸 언양 죽림굴을 찾은 필자.
1980년 여름. 내가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찾아간 친구는 외국어 회화 교재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른바 영업 사원들을 교육시켜 가정 판매를 하는 것이다. 이날 나는 세일즈맨이 되기로 하고, 영어·일어 회화 카세트 테이프 가방과 팜플렛을 받았다. 1차 목표는 동생들과 친척들이었다. 아이들 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판매하는 것이지만, 평소 남에게 구차한 말을 하기 싫어하였던 나로선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제법 판매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외국어 교재를 구입하는 이들이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이런 방법으로 나를 돕는다는 걸 잘 알았다. 문제는 2차 목표였다. 대상자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랜 친구들을 찾아가 난데없이 회화 교재 구매를 부탁한다는 건 확실히 1차 목표보다 버거웠다. 그래도 많은 친구들은 거절하지 않았고, 큰 업체 사장으로 있는 후배는 자기 회사 간부들 몫까지 사 주었다. 그런데 하향곡선을 긋던 판매 성과는 드디어 벽에 부딪혔다. 어느 날 친구를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나는, 비내리는 거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빗물에 섞여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문득 세상 살기가 무척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외판원을 그만둔 지 오래지 않아 S출판사 위탁을 받아 이씨조선 역사 집필에 관여하였고, 이 일로 그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나는 출판사 기획에 의해 8년간 「이조 왕비열전」「소설 단군 조선」을 집필했다. 역사 소설을 쓰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잡는다는 사명감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그러나 소설을 쓴다는 의욕에 반비례하여 경제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이 출판사는 재정이 빈약하여 책정된 월급을 제대로 주는 예가 드물었다. 봉급쟁이란 매월 월급 가지고 살아가는데, 당시 봉급 책정은 30만 원 해놓고 10만 원이나 15만 원을 주면서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니, 나머지 돈은 고스란히 체불되었다. 원래 출판사 직원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철새처럼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도 예외가 아니어서 여건이 어려운 걸 눈치챈 직원들은 모두 사직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처음에는 의리 때문에 그만두지 못했고, 나중에는 밀린 봉급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1983년부터 내가 아버님을 모시게 되었다. 아버님이 운영하던 냉동회사가 부도 처리되고, 그 때문에 서울로 피신하여 친지들 집을 전전하신다는 말을 듣고 죽을 먹더라도 내가 모셔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자식 노릇을 하게 되어 내심 뿌듯했다. 비록 넉넉한 가운데 모시지 못했지만, 아침저녁으로 안부 인사를 드리는 것만도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아내는 나의 뜻을 잘 따라 주었고, 아버님께서도 자식 집에 계시는 걸 다행으로 아셨다. 나는 이때 효도란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라 여기고 아버님께서 겪은 부도의 아픔을 덜어 드리기 위해 힘썼다.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이 같은 일을 주위에서는 기특해 하였다. 그래서 동네 영감님들에 의해 구청을 거쳐 정부에 추천되었고, 1987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서울 생활 초기에 잠시 교회 활동을 쉬었던 나는, 1983년부터 신정동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재개했다. 오래지 않아 쁘레시디움 단장에 임명되고, 또 꾸리아 부단장에 이어 단장에 선출되었다. 성모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나로선 주어진 직책을 기쁘게 수행했다. 이때 특히 주력했던 레지오 활동은 이동 문고 활동과 윤락 여성 선도 활동, 그리고 환경 보전 활동이었다. 이동 문고 활동은 진열용 수레를 만들어 미사 전후에 교우들을 상대로 교회 서적을 판매한 다음 번잡한 시장통으로 끌고 가서 외교인들에게 판매하는 활동이었다. 이 활동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신자들이 교회 서적을 읽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고 많은 신자들이 교회 서적을 구입했다.

그러나 천주교를 알지 못하는 외교인들과의 대화를 갖는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윤락 여성 선도 활동은 용산역 주변의 윤락가에서 1년여에 걸쳐 실시했다. 이 활동을 위해 일부러 본당 정예 단원들로써 쁘레시디움을 신설하고 내가 단장을 맡았다. 그리고 자매 단원들이 그 곳 불우 여성 쉼터인 '막달레나의 집' 문 요안나 수녀님과 함께 여인들을 방문하는 한편 남자 단원들은 이들을 상대로 무료 도서 대여 활동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