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월간 ‘레지오 마리애 편집장’ 박광호 신앙수기] 내영혼 쉴데없는 길섶에 (12) 제12장 인생의 소낙비를 뚫고

입력일 2001-09-02 수정일 2001-09-02 발행일 2001-09-02 제 226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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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사직한 나는 광주를 거쳐 목포로 내려온 후 반년 만에 다시 대구로 왔다. 그만큼 우리 가족이 안주할 곳이 없었다. 마침내 단단히 결심하고 단신으로 상경했다.
나는 공해 관리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폐수를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나에게 부하된 책무였다. 검붉은 폐수를 그냥 방류한다는 건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를 품질 관리 담당으로 돌리려면 당연히 다른 공해 관리인을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회사에서 나의 공해 관리 기사 자격증과 품질 관리를 동시에 이용하려는 데 있었다. 나는 회사의 지시에 따라 폐수 처리 시설물을 조수에게 맡기고 품질 관리의 핵심인 TQC(총체적 품질 관리) 조직을 추진하면서도 많은 시간을 시설물에서 보냈다. 회사측으로선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이때 나는 대구 대안동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고 있었다. 쁘레시디움과 꾸리아 단장을 맡았다. 내가 주력했던 활동은 파티마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 방문 활동이었다. 나는 주일마다 병원을 찾았다. 원목실 수녀님에게서 돌볼 환자 명단을 받았는데, 대상자는 비단 우리 신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상 환자를 만나는 동안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도 인사하고 위로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이 그리운 환자들은 나를 반기었다. 더욱이 내가 겪은 투병담을 듣노라면 자기 자신의 일인 듯 감동하였고, 나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들에게는 용기와 힘을 주었으며, 하느님에 관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퇴원할 때는 꼭 가까운 성당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나는 날마다 심신이 고단한 가운데 레지오 활동으로써 기쁨과 보람을 얻었다.

공해 관리인으로서의 삶은 1년여 만에 끝났다. 여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환경 보전이 온 국민, 나아가 온 인류의 명제이지만 현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또 사업체로서의 딱한 입장도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폐수 처리의 경우를 보자. 제대로 폐수를 처리하려면 방대한 시설비를 융자받아 시설해야 하고, 인건비와 약품비, 전력비 등이 소요된다. 이것은 기업체로 볼 때 비생산적인 투자이다. 따라서 이 비용을 부담하려면 생산비가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소비자 부담이 늘거나 기업체 부담이 커진다. 이 까닭에 처리 시설 가동을 기업체가 기피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환경 보전을 하려면 약품비 보조라든가 전력비를 경감해 주는 협조 체제여야지, 무조건 배출 물질을 처리하라고 명령만 하여서는 효과가 없다고 본다. 내가 현장에서 겪은 값진 체험이었다.

스스로 사직한 나는 한동안 집시와 같은 유랑 생활을 하였다. 광주를 거쳐 목포로 내려온 후 반년 만에 다시 대구로 왔다. 그만큼 우리 가족이 안주할 곳이 없었다. 마침내 단단히 결심하고 단신으로 상경했다. 내가 찾은 사람은 「흑조시인회」에서 함께 동인 활동을 하였던 김창완 시인이었다. 당시 김 시인은 《소설문학》 편집장으로 있었는데, 별안간 나타난 나의 사정을 듣고 자신이 서울에서 겪었던 고생을 털어놓으며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모 출판사를 소개해 주었다. 나에게는 위인전 집필위원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이로써 나의 서울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직장은 취직 3개월 만에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다. 이렇게 빨리 실직될 줄 모르고 가족들을 서울로 불러 올린 나로선 낭패였다. 비록 사글세방이지만 잠시 단꿈에 잠기었던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아내는 인형 몸통에 손을 붙이는 일감을 가져왔다. 하루 종일 일해 봐야 몇천 원 벌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때의 심정이 나의 시 〈무제(無題)〉에 잘 나타나 있다. (아내가 일감을 가지고 왔다/직장을 잃은 지 오랜 나로선/말만 들어도 반가운 일감이다/색색의 무늬 아롱진 천에 솜을 넣고/손을 붙이면 된다고 하였다//『이게 뭣이오?』/『인형의 팔이어요』/『팔 하나 만들면 얼마 받으오?』/『2원이어요』/『그럼 백 개를 만들어야 2백 원이게?』//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아내는 시무룩히 반문한다/『노는 것보다 낫지 않아요?』//힘을 잃어버린 삼손처럼/무기력해 버린 남편은/할 말이 없다/하물며 감상(感傷)에 젖기엔 현실이 절박해//나는 일감을 손에 들었다/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어느 행복한 아기의 품에 안길/인형의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부지런히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 일에 한동안 매달리던 나는 직장을 구하러 나섰다. 도무지 가장으로서 체신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앙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배티 불무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