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월간 ‘레지오 마리애 편집장’ 박광호 신앙수기] 내영혼 쉴데없는 길섶에 (11) 제11장 대구에서의 생활

입력일 2001-08-26 수정일 2001-08-26 발행일 2001-08-26 제 2264호 1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대구 공해방지협회에 등록하고 공해 관리 2급 기사 시험에 합격…
대구에서 응시한 사람이 420명이고 여기에서 합격한 사람이 84명인데, 그중 내가 수석이었다.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리라.
많은 새들을 사육하면서 문학 수업에 정진할 때, 가장 열중했던 것은 소설 공부였다. 일찍이 고교 시절에 박화성 선생님으로부터 혹평을 받고 단념했던 것이 소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아쉬움은 깊어 갔다. 시문학만으로는 나의 체험과 상상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어서였다. 그래서 지난날의 결심을 꺾고 소설 공부에 들어갔다. 우선 '소설작법'이라는 책을 탐독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특히 박 선생님에게서 지적당했던 구성에 관해 연구했다. 유명 소설가들의 작품을 앞에 놓고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문맥을 살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던 구성의 본질이 실체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독학을 하면서 새삼스레 나의 단점을 알려 주신 박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했다. 예전에 가졌던 원망이 부끄러웠고, 무지를 깨친 후학으로서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작고하셨으니 어쩌랴.

1976년 여름 나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장인께서 목포에 오셔서 우리 부부가 어렵게 지내는 걸 보고 가신 후 대구에 직장을 마련하여 불렀기 때문이다. 사실 새들을 기른다는 게 노력에 비해 수입이 많지 않았고, 더욱이 병원에 근무하는 아내의 고생이 심한 터여서 모두 정리하고 나섰다. 내 직장은 모 양산회사였다. 총무과에서 산재 환자들을 담당했다. 나는 여기에서 말로만 듣던 일용직 근로자들의 어려운 생활상과 경영자의 부정과 독선을 목격했으며, 가능하면 저임금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을 돕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다음해 봄에 자전거 사고로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 대구에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배웠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아침에도 경쾌하게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나에게로 달려드는 자전거를 피하려다 나가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고로 한동안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일부러 고향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때 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100여명의 근로자들이 성금을 갹출하여 나를 감격케 하였다.

내가 다시 근무하고 있을 때, 목포 아버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에게 공해 관리 기사 자격 시험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 자격증이 있으면 아버님이 차린 냉동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아버님은 노년을 대비하려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냉동회사를 차렸으나 나의 참여를 배제한 터였다. 이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나는 부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열심히 수험 준비를 하였다. 그때 나이가 36세였다. 대구 공해방지협회에 등록하고, 한창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젊은이들과 함께 국가기술검정공단에서 실시하는 공해 관리 2급 기사 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대구에서 응시한 사람이 420명이고 여기에서 합격한 사람이 84명인데, 그중 내가 수석이라고 협회 사무국장이 알려 주었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합격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말해 준다. 그런데 정작 합격 소식을 들으신 아버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대구 침산동에 있는 모 염직회사 공해 관리인으로 취업했다.

이 염직회사에서의 새 삶은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이정표였다. 첫 출근을 한 나는 폐수 처리 시설물 위로 마구 넘치는 폐수를 보고 아연 실색하였다. 알고 본즉, 시설물을 날림으로 만들어 그 동안 개선 명령을 2회나 받은 업체였다. 이 시설물로는 도저히 관리할 수 없어서 여러 시공 업체에서 견적을 받았더니, 회사에서는 엉뚱하게 공해 관리인이 이 견적들을 토대로 공장 실정에 맞는 공해 방지 시설물을 만드라고 하였다. 기막힌 요구였으나, 나로선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내 지식을 총동원해 시설물을 만들었다. 나는 처리하기 힘든 염색 폐수를 중화조(석회와 황산철)→침전조(고분자 응집제)→여과조(활성탄) 처리로써 맑은 물을 방류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이 시설물의 정상 가동을 원치 않았다. 인건비와 약품비 등이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부들의 압력과 회유가 계속되었다. 다른 공장들처럼 한밤중에 비밀 파이프를 만들어 폐수를 몰래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두뇌를 활용해야 한다면서 회사 품질 관리를 담당토록 하였다. 나는 품질 관리가 중요함을 알았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양심과 공해 관리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더욱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