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57) 막시밀리안 콜베 (3)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입력일 2001-04-15 수정일 2001-04-15 발행일 2001-04-15 제 224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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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투쟁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설립
“성모님 통해 주님 사랑에 도달”
콜베는 복음 선포를 위해 출판물 뿐만 아니라 현대의 과학 기술을 홍보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선구자
1) 콜베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과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성모의 기사회를 창립한 때는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세 어린이에게 나타나시던 해이며 러시아가 공산화되었고 반 교회적인 비밀 결사단 프리메이슨(Freemason)이 로마에서 대담하고 난폭하게 활동하던 1917년 10월 17일이었다.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고, 그 목표는 죄인들, 이교도들, 이단자들 및 반 교회 비밀 결사단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모든 이들의 성화를 위해 성모님의 보호와 전구를 빌며 활동하는 것이다.

이 기사회의 운동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통해 추진해 나간다. 회원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날마다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봉헌 기도를 바친다. 기적의 메달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기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에 임한다.

성모의 기사회는 1918년 4월 4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인준되었으며, 1926년 12월 18일 비오 11세는 이 기사회에 특정한 권한과 대사를 허락했고 1927년 4월 24일엔 전 세계에 이 신심 단체의 지부 설립을 허락했다. 한국 교회엔 1976년 5월 20일 대구 대교구장으로부터 교구 내에 지부 설립 승인을 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인천 교구(1982. 2. 16), 마산 교구(1986. 9. 3), 서울대교구(1986. 12. 12), 부산교구(1986. 12. 20), 대전교구(1986. 12. 30), 전주교구(1987. 1. 14) 등 여러 곳에서 지부 설립을 승인 받아 수 만 명의 회원들이 기사회 모임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2) 콜베는 매스 미디어(대중 매체)를 통한 선교의 선구자였다.

「매스 메디어에 관한 교령」을 통해 복음 선포와 교육에 대중 매체를 활용할 것을 권장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30 여 년 전 콜베는 이미 그 위력과 효율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콜베는 우선 출판물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중했으며 놀라운 결실을 얻었다. 그가 동료 수사들과 1922년 1월 창간하여 제작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부수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24년에 1만 2천부, 1927년 5만부, 1929년 11만 7천 5백부, 1931년 43만 2천부, 1935년 70만부, 1939년엔 1백만 부에 달했다. 그는 이어서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라틴어로 쓴 잡지를 발간했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정신을 선명히 드러내는 신문을 발행하여 신속히 광범위하게 유포시켜 대중을 포섭했다. 그러한 성과의 뒤엔 무엇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자세로 콜베와 327명의 노동 수사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콜베는 방송국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영상을 통한 교육 및 복음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초기 단계였던 영화는 교회 안에서 윤리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선교용 가톨릭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일류 배우들을 기용하려 구상했고 성모의 마을 안에 소형 비행장을 지을 계획도 세웠었다.

콜베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출판물 뿐 아니라 현대의 과학 기술을 홍보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였다.

3) 콜베는 노동의 품위를 향상시켰다.

많은 지역에서 그러했지만 폴란드에서는 콜베가 활동하던 시대까지 봉건주의 사상이 남아있어 수사 신부와 노동 수사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다. 노동 수사들은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하층 계급을 대표하듯 중노동을 했던 것이다.

콜베는 수도회의 설립자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복귀하는 쇄신을 시도하였다. 민주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당시에 일대 혁신을 이룩한 성 프란치스코는 일생 사제 아닌 평 수사(부제품은 받았음)로 살았다. 콜베는 수도원의 관행적 차별을 파기하면서 노동 수사들을 수사 신부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던 제 일선의 지위로 높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득권 층에 있던 일부 사제들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창립자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철저한 청빈과 모범적 순종의 자세, 순교자적 헌신과 봉사 그리고 열렬한 애덕은 함께 살며 공동 작업을 하던 동료 수사들로부터 존경과 사랑 그리고 적극적인 협력을 얻도록 했다.

한편 콜베는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수도복을 입은 채 기계를 다루며 일하는 모습의 사진을 잡지의 일부 면에 삽입하곤 했다. 그것은 수도자들은 종일 기도만 한다든지 혹은 노동이란 농사일을 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던 일반인들에게 발전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역동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4) 콜베는 신앙 때문에 직접 박해받진 않으나 이기심과 편이주의에 안주하도록 유혹

받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현실적 귀감이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 13)고 가르치셨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실천하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콜베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며 목숨을 바쳤다. 그가 실천한 그 최고의 사랑은 나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은총이 가능했을까? 성령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민감히 깨어 응답하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언제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 놓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용의로 매 순간 결단을 내리며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기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추구되어야 할 실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는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 살고있진 않으나 물질 만능주의와 무신론적 분위기가 확산되어 편이와 이기심에 안주하도록 끊임없이 유혹 받으며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선 매일 매 순간 순교자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에서 그렇게 길들여진 복음적 삶이 본 의미의 순교가 요구되는 극한 상황에 처할 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은총에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며 보증임을 순교자들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는 콜베의 생애에서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5) 콜베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 외에 우리 땅을 밟았던 또 한 분의 성인으로서 우리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준 분이다.

그는 1903년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한국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때 동생 신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한국을 가로지르며 한 여행은 너무나 굉장해서 모두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부산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후 배를 타려면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해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도시엔 여섯 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는 것과 성당은 한국을 통틀어 세 개쯤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 성모께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에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세우실까?』

당시 한국의 성당 숫자에 대한 정보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콜베가 그 때 한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