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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희년 평신도대회 특집] 정하상 바오로 성인 심포지엄

마승열 기자
입력일 2000-11-05 수정일 2000-11-05 발행일 2000-11-05 제 222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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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여규태, 지도=정월기 신부) 는 올해의 평신도 상으로 정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와 활동을 고찰해보는 장을 마련했다. 한국 평협은 10월 27일 오후 2시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심포지엄을 열고, 한국교회 평신도 중 대표적 지도자였던 그의 활약상을 되돌아보았다. 특히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 인물로 성직자 영입과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교회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오늘의 평신도들에게 그의 신앙을 널리 전하고 본받게 하기 위해 마련된 이 심포지엄을 지상 중계한다.

■ 정하상의 생애와 교회활동 (서종태·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교리와 유학 소양 충분

호교론 상재상서 저술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은 북경을 9회나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하여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했고, 유방제 신부,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을 영입했다. 그 뒤에는 그들의 복사가 되어 사목활동을 충실하게 도왔으며 기해 박해 때에는 미리 준비한 호교론서인 '상제상서' 를 재상 이지연에게 제출하여 박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 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다가 순교했다. 이러한 그의 뛰어난 활동으로 인하여 정하상은 한국 교회 평신도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오늘날 주목받고 있다.

정하상의 생애와 교회활동을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정하상과 그의 가족이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 마재에 가서 붙여 산 집은 정약현의 집이 아니라 정약용의 집이었다. 신유박해 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정약현의 집은 정하상의 가족을 받아줄 입장에 있지 않았다. 반면에 정약용의 집은 정하상의 집과 마찬가지로 폐족의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정하상의 가족을 받아줘도 별 문제가 없었다. 신유박해 때 피해를 당해 마찬가지로 폐족의 처지에 있던 정약용, 정약전 가족들은 정하상 가족들을 돌보아 주고 보살피며 살았다고 이해된다.

둘째, 정하상은 뛰어난 호교론서인 '상재상서' 를 저술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유교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어머니로부터 구전 교육을 통해 그의 아버지가 저술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를 비롯해 기본적인 교리서와 경문도 배웠다. 그 결과 정하상은 20세에 가출하기 전 이미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 셋째, 정하상이 함경도 무산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조동섬을 찾아간 것은 달레의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 처럼 학문과 교리를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0세에 가출하기 전 이미 유학과 천주교 교리에 대한 소양을 충분히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조동섬에게 받은 지도자 수업은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는데 아마도 중요한 지침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정하상의 신학사상 - 상재상서를 중심으로 (한건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유교경전 용어 사용해 천주교의 정통성 주장

상재상서는 박해의 부당성을 알리고, 천주교의 교리를 풀어 밝히는 부분, 호교론을 전개하는 부분, 그리고 정부에 대한 호소란 세 부분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 정하상은 천지만물의 창조자가 있음을 말하고 인간에게 양심이 있음을 들어 천지만물의 창조자가 존재함을 이야기 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호교론(護敎論)을 전개시킨다. 그는 먼저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가 아니라고 변호하며 이와 같은 말은 천주교의 참뜻을 모르는 것이라 주장했다.

셋째 부분은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정하상은 천주교가 조선의 성리학적 전통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이 천주교의 정신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변증한다. 정하상은 유교적 학문적 소양과 체계화된 신학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상재상서의 저술을 통해 신에 대한 설명보다는 성교(聖敎)의 도리를 밝힘으로써 당시 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을 지적하고자 했다.

당시 정부는 천주교를 원국지도(怨國之徒)의 집단으로서 사회변동을 꾀하며, 신부제적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 당국은 천주교를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며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정부 당국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대해 그는 유교 경전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천주교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는 유교 경전이 천주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천주교의 기록이 더 오래되고 완벽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천주를 섬기는 천주교는 정통이기에 옹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자신의 아버지 정약종이나 진외사촌 윤지충과 마찬 가지로 정부 당국을 설득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대신에 유교 도덕보다 천주교의에 우선권을 두고 정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고수한 죄목으로 1839년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정하상은 천주교를 유교로 채색할려고 했지만 이미 국가를 저버린 부도덕한 무뢰한으로 비난 받았던 것이다.

마승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