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38) 경자(庚子)교난 4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1999-09-19 수정일 1999-09-19 발행일 1999-09-19 제 216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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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에 난입, 약탈·방화
기도하던 교우 50명 소사(燒死)
남당(南堂)에 방화

남당은 북경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성당이다. 예수회 마태오 리치 신부가 1605년 민가를 사서 1610년 규모가 작은 성당을 건립하였다. 아담 샬 신부가 흠천감 감정으로 있을 때 순치제의 도움으로 1650년에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순치제가 이곳을 자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 성당에는 천문대, 장서루(臧書樓) 의기실(儀器室)이 있었다. 1690년 북경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프란체스코회 델라 키에쎄(尹大仁) 주교가 제1대 주교로 부임하였다. 물리 주교 때부터 주교가 선교방면에 공헌을 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주교 밑에 신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1775년 대화재가 나서 성당이 전소되었다.

건륭제가 은전 1만냥을 하사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1838년 피레스 주교가 서세하자 정부에서 남당을 몰수하여 러시아 정교회에 넘겨주었는데 1860년 교회에 반환되었다. 남당의 면적이 상당히 넓어 경자교난이 일어날 당시 성당의 문생의원(文生醫院)은 인애회(仁愛會) 수녀가 관리하였고, 중국 방인수녀회인 요셉수녀회 총원(總院)이 남당에 있었으며 또 학교도 설립하여 성모소곤중회(聖母小昆仲會) 수사들이 관리하였다. 남당의 신부들과 수사들 수녀들은 6월 13일 저녁 영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4일 오전 10시부터 의화단이 와서 남당을 파괴하고 방화하였는데 중국 군인도 가담하였다. 의화단은 먼저 도끼로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창과 문을 부수고 약탈을 하고 인화물을 끼얹고 방화하였다. 교우 몇명은 종루에 올라가 타종을 하다가 그대로 소사하였으며 남당에 딸린 학교에도 방화하여 화염에 싸였다. 의화단은 처음에 사제관에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잠복한 것으로 알고 접근을 못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아무 기척이 없자 의화단은 사제관에 들어가 약탈을 하고 방화하였다. 성당 갱의소(更衣所)에 교우 50여명이 모여 큰 소리로 기도하였는데 기도 소리가 끊겼다고 한다. 50여명이 모두 소사한 것이다. 오후 5시경에야 불길이 수그러졌다 한다. 의화단 난이 끝난 후 1904년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북당(北堂) 포위

북당은 강희제가 학질에 걸렸을 때 예수회 선교사들이 치료해준 공로로 하사받은 땅에다가 성당을 건립하여 1703년 12월 9일 낙성식을 하였다. 이승훈(베드로)가 북당에서 1784년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북당은 1827년 정부에 몰수됐다가 1860년 교회+에 반환하였다. 라자리스트회 물리 주교는 남당은 북경 중심가와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주교좌 성당과 주교관을 북당으로 옮겼다. 북당은 라자리스트회의 요람이기도 하다. 1866년 북당을 14세기 고딕식으로 신축하였는데 성당 안에 제대가 3개 있었다. 원래 50미터나 되는 높은 종루가 설계에 있었는데 북당이 황궁과 가까이 있어 종루가 높으면 황제의 기분을 상할까 염려되어 종루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서태후(慈禧太后)가 1872년 나이어린 동치제를 섭정하였는데 동치제가 성인이 되자 서태후는 황궁과 멀지않은 곳에 궁을 지어 나가려고 터를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북당지역이었다. 정부에서 북당을 내놓으라고 하므로 선교사들은 북당터는 강희제가 하사한 땅이라고 정부측에 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교회측에서도 북당을 옮기자는 의견이 자주 나왔는데 동치제가 서거하고 나이 어린 광서제가 즉위하여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하게 되어 북당을 옮기란 말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광서제가 성인이 되자 서태후가 궁을 지으려고 하는데 북당이 그대로 있으므로 좬북당문제가 아직도 해결 않되었느냐좭며 화를 냈다고 한다. 당시 북경 주교가 파비에르 주교인데 상당히 능력이 있고 외교에 뛰어나 정부측과 타협하여 2000냥을 받고 서십고(西什庫)에 7무(畝)반의 땅을 구입하였는데 이 면적은 이전 북당의 2배의 크기의 땅이다. 먼저 북당은 1887년 12월에 총리아문에 넘겨주었다. 1887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888년 12월 9일에 성당 축성식을 하였다.

북당에는 주교관, 사제관 중문서적 도서관, 서양서적 도서관, 마굿간, 창고, 대소수원(大小修院 신학교), 인쇄소, 과수원, 고아원, 학교, 진료소, 인자당(仁慈堂), 관리인 숙소, 수녀원 등이 있었다.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