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35) 경자(庚子)교난 2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1999-08-15 수정일 1999-08-15 발행일 1999-08-15 제 216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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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약탈 화형 살해 등 박해 거세
피난 교우들 자위대 구성 맞서기도
의화단이 산동성 북부에 수백여 개의 성당과 개신교 교회를 파괴 방화하였으며 산동성 남부에도 남아 있는 교회 건물이 거의 없었다. 거야 장장(張庄)본당 교우들은 성당에 모여 성당을 사수하였다. 의화단이 성당에 방화하고 성당과 의원을 신축하기 위해 회와 벽돌을 쌓아놓았는데 벽돌과 회를 시중 가격보다 20~30% 싸게 팔아 나누어 갖고 교우들의 주택에 방화하고 가축을 끌어내어 잡아먹었다.

원세개가 의화단을 탄압하자 의화단은 직예성(하북성)으로 들어갔다. 의화단과 관군이 남피현(南皮縣)과 길행촌(吉行村)성당을 습격하여 무장하고 방어하던 신부 2명과 교우 100여 명을 살해하였다. 남대현(南大縣)에서도 의화단의 습격을 받아 신부와 교우 100여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선화부(宣化府)의 교우 수백명이 산 속 동굴에 숨어있는데 의화단 단원들이 동굴 입구에 불을 질러 동굴 속에 있던 교우들을 다 소사(燒死)시켰다. 개신교 신자 주왕(周王)씨는 어린 아이 5명을 데리고 산에 숨었는데 아이들이 허기가 져서 울어대고 의화단은 뒤를 쫓아오므로 막내 아이를 버리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헌현(獻縣)에 천주교회에서 1862년 육영당(고아원)을 세우고 1866년에는 대성당을 건립하였다. 1900년경에는 헌현교구에 교우가 약 5만여명 되었는데 경자교난 때 의화단이 교우 4000여 명을 살해하고 100여 명을 생매장하였다. 이때 교우 왕영복(王永福)은 세례명이 요셉인데 의화단이 화형을 시켰다.

경자교난은 고대 로마의 박해와 비슷하였다. 고대 로마에서 교우들을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하고 화형을 시켰다. 유장(劉莊)마을의 교우 유이(劉李)씨와 시고모 마유(馬劉)씨를 체포하여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세워 화형을 시켜 살해하였다. 중국에서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 성을 따라 두 개의 성을 갖게 된다. 경주(景州)에서 교우 부자를 함께 체포하여 화형을 시키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조심해라. 영혼과 육신이 다 실락(失落)하지 않게 하라하고 격려하면서 두 부자가 화형으로 치명하였다. 의화단 난 때 교우들을 배교시키려고 토막 살인까지 하였다.

주가하(朱家河)의 대학살

의화단이 난을 일으켰을 때 가장 격렬했던 곳이 직예성 경주현(景州縣)의 주가하이다. 주가하는 작은 촌으로 북경에서 남쪽으로 500~600리 거리에 있으며 하(河)가 있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주(朱)씨 성을 가졌으므로 이곳을 주가하(朱家河)라고 하였다. 주가하에는 동서 두 개의 촌이 있는데 동쪽은 동주가하라고 부르고 서쪽은 서주가하라고 불렀다.

서주가하에는 모두 비교우가 살고 동주가하에는 400여 명의 교우가 살고 있었으며 주민의 80~90%가 교우였다. 18세기 동주가하에 한 사람이 교우 자부를 들여옴으로써 차츰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주가하는 작은 촌이었으나 경주 전 구역의 총당(總當 그 지역의 중심되는 성당)이 있었다. 주가하의 교우들은 그곳에서 40여리 떨어진 무읍(武邑)성당에서 의화단의 습격을 받아 신부와 교우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총당의 본당 신부는 복자 임덕분(任德芬) 신부였다. 1900년 5월 경현(景縣), 동광(東光), 오교(吳橋), 영진(寧津), 부성(阜城), 고성(故城), 무읍(武邑), 교하(交河) 등 현의 교우들이 모두 주가하로 피난을 왔으며 복자 탕애령(湯愛玲) 신부도 교우들을 인솔하고 주가하로 왔다.

주가하는 3000여 명의 피난 온 교우들로 우마차가 만가만항(滿街滿巷)을 이루어 길이 막히고 떠들썩 하였다. 교우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이유는 이 곳이 총당이기도 하지만 주가하는 비교적 지대가 험하므로 자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화단을 방어하기 위해 호구(壕溝)를 파고 무기도 가지고 있었으며 교우 중에 장정이 1000여 명 되었다. 7월 14일 경에는 방어 공사가 이미 끝이 났었다고 한다. 신부들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주었다.

부녀들과 어린이들은 성당에 있고 장정들은 의화단과 싸웠다. 의화단은 참호(塹壕) 주변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교우들에게 격퇴당했으며 하루 종일 접전하다가 저녁에야 정전을 하였다. 의화단은 로가장(路家莊)으로 물러났다가 다른 지역의 의화단과 합류하였다. 수천 명의 용맹한 의화단들이 무기를 들고 주가하로 왔으나 그날도 실패하였다.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