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현대순교자를 증언한다 (3) 경향잡지사 김한수

박영호 기자
입력일 1999-08-01 수정일 1999-08-01 발행일 1999-08-01 제 216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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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보필서 교회재산 관리까지 “교회가 잊어서는 안될 귀중한 분”
“잡지사를 버릴 수 없다”

1950년 6월25일. 공산군이 38선을 넘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명동성당 구내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드리워졌다. 일부 신부들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고 책임 있는 신부들은 상황을 지켜보자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경향잡지사」 김한수(노렌조.당시 65세) 총무는 큰 아들 용훈과 용덕을 불러 피난을 권했다. 이에 두 아들은 『아버지도 같이 가셔야지 저희들만 어떻게 갑니까?』하며 함께 몸을 피할 것을 권유했다.

『나야 다 늙은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니. 잡지사를 버릴 수는 없다. 너희들 어머니 모시고 어서 떠나거라』 통칭 「잡지사」로 널리 알려져 있던 「경향잡지」는 김총무의 평생이 담겨 있는 곳이었기에 차마 공산군의 손에 남겨 두고 피난길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잡지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온갖 살림을 도맡다시피 하던 그로서는 텅 비어있는 주교관이 공산군의 군화발에 밟히리라는 근심에 도저히 길을 떠날 수 없었다.

한 달 후 다른 식구들은 굳이 남기를 고집하는 아버지 김총무를 뒤로 하고 뿔뿔이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공산군은 잡지사에 남아 있던 김총무를 내몰다시피 쫓아냈다. 하지만 그는 성당 구내에서 쫓겨난 뒤 을지로 3가에 있는 산림동(山林洞) 사위집으로 거처를 옮겨 멀찍이서나마 성당을 바라보며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른 명동성당 회장들이 납치된 같은 날인 9월 16일 사위집에도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사위 김인배 회장을 찾아왔으나 김회장이 피난을 갔다는 대답에「꿩 대신 닭」이라며 김한수 총무를 끌고 갔다.

피난에서 돌아온 가족들은 김총무의 납치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찾아나섰다. 가족들은 김총무가 원체 연로해 그리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집단 학살을 당한 곳들을 찾아 남산을 비롯해 5일 동안 80여구에 이르는 시체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시신마저 찾을 수 없었고 김총무의 부인 박 수산나 여사는 급기야 쓰러져 두달 동안이나 실신해 사경을 헤매야 했다.

살아있는 교회 백과사전

김한수 총무는 서울 효자동에서 정부 고관의 후손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다가 신학문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3년 동안 법문(불어)학교를 다녔다. 당시 동기 졸업생은 모두 4명. 그 중에는 장면 박사의 부친도 있었다. 19세에 법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입신양명의 길이 열려 있었으나 가톨릭에 입교한 후 관직을 마다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기로 했다.

관직 마다하고 교회위해 헌신

민대주교의 비서 겸 총무로 있으면서 같은 날 납치된 정남규 회장과 함께 교회 재산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관리해낸 것은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뿐만 아니라 성물 판매, 교회 토지 관리, 외국 원조 분배 등 거의 모든 영역의 교회 활동에 광범위하게 관여했다.

그는 민 대주교에서부터 노기남 대주교까지 여러 명의 주교를 보필해왔고 경향잡지사가 시작된 후 주교관과 잡지사 일을 함께 담당했다. 경향잡지를 비롯한 교회 내 모든 일에 관여함으로써 당시 그를 잘 아는 성직자나 중진급 인사들은 그를 일러 「살아있는 교회 백과사전」이라고까지 불렀다.

장면 박사는 후일 『김총무는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한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귀중한 분』이라고 회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