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32) 경자(庚子)교난 前의 교난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1999-07-25 수정일 1999-07-25 발행일 1999-07-25 제 216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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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曹州) 교난

조주(曹州) 서주(徐州) 교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두가지 설이있다. 단현(單縣) 동북쪽으로 5, 6무(畝)의 주인 없는 저지대 땅이 있었는데 인근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서 낚시도하고 농사를 지었다. 교우들이 이 지역을 사용하여 교우와 민중이 충돌하여 일어났다는 설이있고 또 하나는 방삼걸(龐三杰) 이란 사람이 이 땅을 회수하기 위해 대도회(大刀會 의화단)에 의뢰하여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이 교난 이후 조주, 성무(成武), 풍현(豊縣), 패현(沛縣) 등지에 대도회가 활동하게 되었으며 참가자가 수천명이 되었다. 산동성의 남쪽과 강서성의 북쪽 성당과 개신교 교회가 모두 파괴되었다.

낙리(樂里) 교난

능운현(凌雲縣)의 낙리(樂里)는 원래 산촌의 시장이었으나 사람은 얼마 살지않았다. 낙리에 선교사가 들어간 것은 1854년 서림(西林)에 선교사가 잠입하면서 부터 선교가 시작되었다. 낙리는 서림, 백색(白色), 남녕(南寧), 오주(梧州) 등의 선교사들이 지나는 길목으로 선교사들이 묵어가는데 편리를 제공하였으며 선교사가 상주하지 않고 성당을 관리하는 사람만이 있었다. 성당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므로 매우 작았으며 1878년 전후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낙리 성당에 속한 땅이 10여무(畝) 있어 여기서 나오는 소작료로 성당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의 봉급을 주었다. 1897년 3월 프랑스 마젤 신부가 낙리에 부임하였는데 중국인들은 마젤 신부를 등(鄧) 신부라 불렀다. 당시 흉년으로 십실구공(十室九空·많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음)이 되었는데 마젤 신부가 새로 부임하여 실정을 모르고 소작료를 독촉하였다. 독촉을 받은 소작인이 유유한(游維翰)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유유한이 군중을 이끌고 가서 마젤 신부를 살해하고 성당을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거야(巨野) 교난

뒤늦게 동아시아에 진출한 독일은 1880년대부터 적어도 독일인 선교사의 보교권만이라도 획득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을 설득하고 방해하던 프랑스와 10여년 협상한 끝에 1891년 마침내 산동성 남부에서의 독일 국적 선교사의 보교권을 획득하였다.

독일은 1896년과 1897년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교주만(膠州灣)의 조차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즉시 군사를 동원해 교주만을 점령하자고 주장한데 대해 당시 수상이 한 두해 참으며 교난이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권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실 얼마 안있다가 산동성 거야현에서 교난이 발생하였다. 거야현의 장가장(庄家莊)성당에 괴한 23명이 칼을 들고 들어와 독일인 니에 신부와 헨리 신부 2명을 살해하였다. 두 신부는 양곡(陽谷) 일대에서 선교하고 있었는데 성인의 날에 손님으로 왔다가 변을 당했다.

장가장 성당은 매우 작은 성당인데 본당 신부가 평소 교우와 일반인과의 문제가 발생하면 교우 편을 들고 소송사건이 일어나면 지방관에게 압력을 넣어 교우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리도록하여 일반인이 손해를 보았다.

이리하여 장가장 주민들은 불만과 원한을 품고 있었다. 교우들과 일반인들은 각종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서양 선교사에게 부탁을 하고 의지하였다. 일반인들은 서양선교사를 찾아와서 부탁하기를 만약에 소송에 승소하게 해주면 전 가족이 입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마을 전체가 입교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무의식 중에 이런 선교방식에 빠져들었으며 선교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아누일 주교는 이런 선교방식을 쓴 대표인물이며 아누일 주교의 선교방식을 모방한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선교방식을 쓴 시대를 소송시대(訴訟時代)라고 하였으며 이 소송시대는 약 30년 이상 계속되었다.

독일은 이 교난을 구실로 삼아 수척의 군함을 교주만에 정박시키고 청도(靑島)를 점령하고 청정부를 위협하여 1898년 3월 교오조계조약(膠澳租界條約)을 체결하여 배상금과 주모자 처벌을 요구한 것 외에 교주만을 99년간 조차하고 산동 경내에 교주만으로부터 제남(濟南) 및 산동 서부변경까지 남북 두개의 철도 부설권 및 철도 주변의 양쪽 30리 내의 채광권을 빼았았다. 이리하여 산동은 독일 세력의 범위에 들어갔다.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