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55) 막시밀리안 콜베 (1) 영성사안에서의 위치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입력일 2001-04-01 수정일 2001-04-01 발행일 2001-04-01 제 224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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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신학박사 학위 차례로 취득
성모님과 함께한 사랑의 순교자
사랑의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인이다.그것은 그가 단순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감방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영웅적 행위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한평생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고 늘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 중에 살았기 때문이다.

매일의 사랑의 순교자적 삶이 그를 순교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했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아사 감방에서의 죽음은 그의 거룩한 삶의 자세를 세상에 밝혔을 따름이다.

생애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준스카불라에서 아버지 줄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라이몬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막시밀리아노」)는 수도원에서 착의식 때 받은 이름임).라이몬도는 열심한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1907년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며 3년 후에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는 수련을 마치고 1911년 9월 5일 유기서원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장상들은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하여 그레고리안 대학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학업 중이던 로마에서 그는 1914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종신 서원을 했다.

다음해 10월 22일엔 그레고리안에서 최우수 성적을 인정받으며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허약한 중에도 학업으로 과로했던 그는 1917년 여름에 폐결핵에 걸렸고 그런 상태에서 그는 여전히 학업에 열중했다.

그 해 10월엔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다.

10월 17일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새로운 회원들은 끊임없이 늘어갔다.

성모의 기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기도, 좋은 표양, 고생 그리고 노동이었다. 1918년 4월 28일 콜베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프라테의 성 안드레아 성당의 「기적의 제단」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학업을 계속한 콜베는 다음 해 7월 22일 같은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몹시 쇠약해진 그는 9월에 폴란드로 귀국했고 크라코프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0월엔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요양치료가 필요했고 결국 그는 자코파네의 요양원서 근 일년 동안 치료받으며 머물러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사도직을 수행했는데 기회 되는대로 환자들을 방문하며 대화했고 가르쳤으며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했다.

병세가 호전되어 그는 크라코프에 돌아가 다시 일을 하였다. 1922년 1월,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했다.

장상의 명령으로 그로노드로 이동해서도 여전히 잡지를 발행했다.

처음엔 잡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냈으나 많은 이들이 후원금을 보내어 계속 출간할 수 있었다.

5천 여부 발행되던 잡지가 1925년엔 배로 증가되었다.병이 재발하여 콜베는 다시 자코파네 요양원에 가 1년 반 동안 치료받았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동생 알퐁소 신부가 대리로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 중에 1926년에 잡지가 4만 5천부로 늘어나 발행되었다. 중병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난 그는 그로노드로 다시 돌아 왔다.

1927년 10월 드루츠키 공작으로부터 땅을 기증 받게 되어 콜베는 출판부 수사들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니에포칼라누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판자집을 짓게 되었는데 주민들이 음식 준비와 노동으로 봉사하며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22일엔 드디어 성모의 마을에 입주했다.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발행 부수는 매년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27년 5만 부 발행되던 잡지가 8년 후인 1935년 70만 부로, 그후 5년 되던 1940년에 1백만 부에 달했다.

한편 콜베는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의 필요성을 느껴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를 발간했고, 외국인들을 위한 잡지로 라틴어로 쓴 「Miles Immaculatae」(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내었다.

그는 이어서 가톨릭 정신이 선명하게 부각되며 어느 당파나 개인적 이익을 초월하는 신문을 1935년 5월에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작은 신문」(Maly Dziennik)이었다.

훌륭한 편집에 저렴한 구독료, 무보수 독지가들의 판매 봉사 등으로 신문은 신속히 그리고 널리 유포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콜베는 그 성공의 비결을 알고 있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작은 신문」의 출발점은 9일 기도였다.

콜베는 창간호가 나오기 9일 전부터 327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단식과 많은 희생을 봉헌하며 성체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콜베는 성모의 마을이 창립 된지 3년이 되어갈 때 동양 선교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동기는 어느 날 그가 기차에서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하느님과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관구장을 찾아가 일본에 성모의 마을을 세우고 선교하고 싶은 뜻을 표명했다. 장상들이 허락하여 그는 4명의 수사와 함께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다음해 4월 24일에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도착 후 만 한달 되던 5월 24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고국의 성모의 마을에 보냈다.

『오늘 창간호를 보냅니다. 인쇄소를 설치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만세! 막시밀리안. 』 콜베는 1931년 5월에 히꼬야마 기슭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였다.

일본에 도착한지 2년 후 1932년 6월에 그는 새로운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기 위해 인도로 떠나 에르나쿨람에 도착했다.

그곳 대주교로부터 인도 선교활동의 허락을 얻었다. 그는 일차 사명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 와 잡지를 더욱 발전시키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6월에 갑자기 콜베는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해야 했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 온 후 심한 박해와 시련이 닥칠 것을 예감하며 자주 언급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전쟁이 절박해옴을 예감했으며 수사들이 영적으로 그것에 대비하도록 촉구했고 자신의 고난에 관해 예고했다.

드디어 1939년 9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범했고 같은 달 19일 나치스 헌병들이 콜베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해 암티스 수용소와 오스체슬로 수용소에 억류했다가 석방했다. 그들은 성모의 마을로 돌아 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복간했다.

1941년 2월 17일 나치스 비밀 경찰에 의해 콜베가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다.

그곳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로 불리던 오셴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절망하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영적 강화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수감자 탈출 사건이 일어나 같은 감방에 있는 10명이 소장에 차출되어 아사형에 처해졌다.

처자를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콜베는 그 대신 아사실을 자원했다. 절규와 비탄이 흐르던 생지옥 같은 아사실은 콜베 신부로 인해 기도와 노래를 부르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했다.

형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명의 수감자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기도해 주고 위로하던 마지막 생존자 콜베 신부에게는 경찰이 독약 주사를 놓았다.

그 때는 그의 나이 47세 되던 1941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인 8월 14일이었다.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