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가을산을 보셨습니까?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입력일 2000-10-29 수정일 2000-10-29 발행일 2000-10-29 제 222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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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일상에서 벗어나 숨막히는 도시를 떠나 가을 산 기슭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나면 또다른 인생이 활기차고 아름답게 눈 앞 에 펼쳐진다. 경기도 의왕시 몰압산 기슭의 성라자로 마을. 동이 터오고 새벽 안개가 걷히면 가을 산은 비로소 수줍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며칠간의 피정 끝에 10월의 단풍이 벌써 몰압산 기슭까지 몰려와 아름답게 불타는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에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는 자신은 이미 하늘 나라에 올라와 있다.

확실히 정염처럼 불타는 단풍은 자연예술의 극치처럼 보이고, 그것은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설흔 여섯 분의 팔순 노인들.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한평생을 나환우로 세상을 멀리하고 이렇게 격리 수용되어 있을까? 성라자로마을 원장 김화태 제르마시오 신부는 그래서 수녀님 들과 함께 이들에게 팔순잔치상을 푸짐하게 차리고 그 앞에 넙죽 업드려 큰절 올리며 만수무상을 기원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참 좋았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시며 두둥실 춤추는 팔순의 노인들은 여기가 천국이라고 했다. 모르긴해도 하늘 나라에는 이렇게 좋은 신부님과 은인들과 음식이 없으리라고 벌써부터 걱정이다. 더우기 저 몰압산 가을철을 불태우는 10월의 단풍이 여기만할라구!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감싸주는 저 산야에는 들풀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지 않은가!

추례한 욕망의 끝에 매달려사는 우리에게 이토록 자연은 큰 위로와 기쁨을 준다. 하지만 가을은 아무래도 조락의 계절. 그 아름다운 단풍도, 불타는 정열도 머지않아 스산한 가을 바람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말 것 아닌가? 이토록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단풍의 생명력이 너무나도 짧게 끝나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팔순을 넘긴 이 생명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지는가! 이 볼상스럽고 불편한 겉모습, 천형이라고 했던 나환자의 고통을 기도하며 이겨내면서 오히려 강력한 권력과 엄청난 재력에 노예가 된 저 많은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 인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모든 게 다 영원할 순 없다』『잠시 지나가는 것이다』『영원한 것은 주님 뿐이며 하느님의 사랑이다』『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6-20)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뭘 며칠 더 살겠다고 몇년 더 호강하겠다고…쯔쯔쯔. 저쪽에 가면 영원히 편안히 행복하게 살텐데, 이 좁은데서 이러쿵 저러쿵, 나 잘났다고 나는 돈이 얼마 더 있다고, 지나 가는 사람 다 내려다보며 우쭐댄단 말인가! 그렇다고 밤낮 부자집 대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 풍성한 식탁에서 먹다버린 빵조각이나 주어먹는 신세하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행복을 노래한 사람은 나자로 였다. 문밖에 앉아 구걸할 때 주인집 개들이 덤벼들어 고름을 핥아먹었는데, 이제는 그 부자집 주인이 기름독에서 울부짖 으며 뜨거운 기름만 핥아먹는다고 했는가!

지금도 탑골공원에 할일 없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단풍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처럼 그들도 쓸쓸히 퇴장하던 그날을 얘기하며 무료로 제공되는 식사대접으로 허기를 잠시 메우고 있다. 그대로 이렇듯 따뜻한 손길들이 있어 매일 2000여명이 넘는 노인들은 이곳을 찾는다. 올 겨울은 97년 겨울 그해 겨울처럼 또 추울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이 나온다. 체감경기는 신(新) IMF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줄지않고 늘어만 가고있는 결식 아동들, 퇴사가 아닌 계약기간 만료라는 말을 사용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래서 IMF 이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목숨이라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몰압산의 단풍은 그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조락의 계절 가을은 그래서 우리에게 또다른 인생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영원히 사는 인생.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님이 좋다. 그분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믿고 따르는 팔순의 나환우들이 오늘도 용기있게 온세상에 그 말씀을 전파 하며 기도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너무나도 아름답기에.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