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크리스마스의 참된의미 생각하자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입력일 2000-12-24 수정일 2000-12-24 발행일 2000-12-24 제 2231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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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 애기봉에 성탄 축하의 불이 켜지고, 이땅의 교회마다 『과거를 참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맞자』고 찬미하고 있다. 남녘과 북녘, 한반도의 동과 서, 그리고 모든 이들의 가슴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환희 불 밝히고 있다.

천주교 주교회의가 새천년 대림 첫주일인 12월 3일 발표한 「화해와 쇄신」의 문건은 자기 고백과 반성 없이는 서로 힘을 합쳐 잘못된 점을 뜯어고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올해의 성탄절은 더욱 뜻이 깊다.

해마다 맞는 성탄절이건만 우리는 성탄절의 의미와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슴에 새기고 있는가. 해마다 되새겨 우리들 삶의 지표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크리스마스, 세계는 언제 부터 예수님을 기려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행사를 시작했을까? 서기 350년 쯤부터라고 하는데….

터키 지중해 연안에 살던 니콜라우스 주교는 불우 이웃을 돕고 어린이를 귀여워하는 할아버지로 소문났었다. 이 얘기가 퍼져서 11세기엔 유럽에서 가난한 이를 돕는 니콜라우스 할아버지가 수없이 생겼고, 17세기에 미국에 이민간 화란인에 의해 산타클로스로 명명됐다고 한다.

니콜라우스 주교는 지참금이 없어 결혼 못하고 약혼자들과 헤어진 세 자매를 도우려고 그들이 잠든 틈을 타서 금주머니를 창으로 던져넣었다. 하필 이것이 벽난로 옆에 말리려고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선물을 기다리는 양말의 시초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독일의 한 어머니가 아무도 몰래 아이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마련해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잤다. 밤새 거미 한마리가 가지에다 줄을 쳐버렸다. 아기 천사가 안타까와 거미줄을 금빛 은빛으로 물들였다. 하느님의 경이로운 은총이지만, 햇빛에 그렇게 눈 부시게 보였던 것,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습관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타 할아버지는 그것과는 다르다. 백화점이나 시장마다 산타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고 세워져 있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의 수호신이 이제는 상인들의 수호신이 된 것일까?

그러나 산타클로스의 환상을 이용해서 상인들이 경기를 누린다 하여 흰눈으로 흘겨보지는 말자. 불경기를 극복하려하고, 근근히 경제한파를 이겨가고 있는 서민들에게 위안이요, 기쁨이 돼주면 그것으로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선물을 가장한 뇌물 수수방법으로 이용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도 노하실 일이다. 인색하고 탐욕스럽기로 이름난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는 성탄 전야인데도 조카 아이의 축하인사도, 빈민구제 때문에 기부금을 모으러 온 노신사들의 간곡한 부탁도 뿌리친 채 돈세기에만 골몰한다.

그날밤 꿈에 한패거리였던 죽은 마아레의 망령이랑 크리스마스의 정령이랑 미래의 요정들이 나타나서 이기적 생활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이 꿈의 계시에서 졸지에 참다운 인간생활을 깨우친 스크루지영감은 그때부터 사람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

『고요한밤, 거룩한밤』하고 들려오는 성가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이다. 성탄의 참다운 의미는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참다운 인간생활을 깨우치고 스크루지 영감처럼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떼내서 이웃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거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정신을 가르쳐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스스로 못박히는 그지없이 인자한 예수의 면모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당시의 로마제국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역사적 가치전환의 발상을 내세우며 성전에서 타락한 장사치들을 날카롭게 꾸짖고 모질게 다스리는 추상같은 예수님의 면모다.

우리는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인간으로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한 이 시대의 예수님을 기다린다. 실직의 아픔을 안고 추운 거리로 내몰린 이들, 거리에서 한데 잠을 자며 조금씩 절망의 늪에서 빠져가고 있는 이들에게 인자한 예수님의 손길은 절실하다.

그런가하면 높은 권자에서 권력과 돈으로 뽐내고 사치하다 검은 유혹에 빠져 자신을 망쳐버린 이들에게 추상같은 예수님의 심판도 절실하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엔 인자한 예수님과 추상같은 예수님이 함께 있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