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따뜻한 가슴 지닌 의사들을 위하여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입력일 2000-10-15 수정일 2000-10-15 발행일 2000-10-15 제 222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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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이 피었다고 한다. 억새밭이 은빛 물결을 이루었다고 한다.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억새가 가을바람에 몸을 실어 나부끼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억새꽃을 피운다는 명성산의 억새밭에 가보고 싶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명성산은 신라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울었다고도 하고, 후삼국시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이곳으로 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었다 하여 명성(鳴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산에 올라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며 역사의 교훈도 얻고 싶지만 마음이 그렇지가 못하다. 가을인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차와 한보철강이 어떻고 거액의 뭉칫돈이 어떻다는 문제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태풍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주가가 떨어지고 기름값이 오르고 하는 일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당사자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권력형 부정 이라고 여기는 사건들 때문이기도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탓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속깊은 썰렁함이 우리들 삶의 불안하게 한다. 얼마전 서울대 교구 시흥4동본당 박기호 신부가 쓴 칼럼을 읽은 일이 있다. 『의사님들! 간절히 호소합니다』란 제목의 글이었다. 그는 3차 대파업으로 인한 파행적 진료로 미국행 의료 난민이 늘어나는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려야할 지 반문 하며 우리 사회의 잔혹한 현실에 슬픔과 분노가 교차 한다고 술회했다.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은 아니겠지』하고 성모병원을 찾는 이들의 실망과 허탈한 발길을 생각 하면서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한 마음으로 병환 중인 분들과 그 가족, 타종교인, 그리고 모든 국민들께 무릎 꿇어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했다.

비단 성모병원 의사들만을 비난하는 말은 아니리라. 신분과 귀천을 불문하고 무상의 치유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제로서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사들에게 간절히 호소한 것이리라. 1956년 쿠바혁명전에 몸을 던진 혁명가로 체 게바라가 있다. 체 게바라는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저항하지만은 않았다. 혁명가이며 의사이기도 한 체 게바라는 검은 베리모와 짙은 구레나루에 시거를 씹으며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누비면서도 항상 치료용 약품과 붕대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는 볼리비아 정글에서 39세 한창 나이로 외로이 삶을 마감했다. 투쟁적 생애의 결말을 성공적인 의사로서 마친 것이다. 그래서 사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있다.

의사로서 따뜻한 가슴을 가졌고 투쟁도 대중과 호흡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왜 그런 의사를 갖지 못한 것일까? 따뜻한 가슴보다 뜨거운 투쟁 열기만을 불태우는 우리 나라의 젊은 의사들은 청진기 대신 파업이라는 무기로 싸우고 있다. 암세포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죽음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환자들이 울부짖어도 젊은 의사들은 막무가내다.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고 서릿발 같은 공권력을 집행한 경찰이 주무 부처 장관에 이어 고개숙여 사과했으니 스스로 승리했다고 자평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 투쟁의 깃발을 들고 점령군처럼 군림하는 의사가 있을까?

암환자의 참담한 울부짖음을 나몰라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비정한 의사가 어디 있을까? 미국 근대화가 동터올 무렵 조그만 읍내 의사들은 부잣집에 환자가 생기면 직접 가방을 들고 찾아가서 환자를 돌보고 비교적 두둑한 진료비를 받아왔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이 아프다고 찾아오면 적은 액수를 받고서도 이들을 치료해주면서 생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의료업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됐다. 의사들이 사회의 소득재분배 역할에 한몫을 담당했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제도도 사회적 장치도 없어 보인다. 저마다 자기 몫,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자존을 지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가 못되고 있다. 의사들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평범한 사람의 머리와 가슴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정직하게, 겸손하게 스스로를 살펴보고, 차가운 이성과 함께 따뜻한 가슴을 지닌 한 사람으로….

봉두완(다위.광운대 신문방송학 교수·대한적십자사 부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