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대희년을 배웁시다 (38) 대희년과 은사

박영식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1999-12-26 수정일 1999-12-26 발행일 1999-12-26 제 2182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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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는 삶 안에서 사랑 실천하게 만들어
주님의 은총의 해이며 죄의 용서와 참회와 화해의 해인 성년에 교회는 은사를 많이 베풀고자 한다(「제삼천년기」 14항). 그러나 은사의 교의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은사라는 말을 들으면 즉시 교회 역사에서 있었던 남용, 특히 레오 10세 때에 은사를 팔았기 때문에 루터의 반발을 샀던 저 유명한 사건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은사를 시행해 온 역사를 따르면,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인간이 태도를 바꾸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으며 하느님과 화해했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면, 곧 인간을 완전하게 치유하는 데 방해가 되는 과거의 기억은 보존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교회는 천국 뿐만 아니라 연옥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거기에서 마지막 정화가 이루어진 다고 가르친다. 과거의 모든 그림자들, 부정적인 모든 기억들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마음으로부터 참으로 회개하는 죄인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고해성사를 통한 죄사함으로 하느님을 거역한 잘못을 용서받는다고 해서 죄로 인해 야기된 영적인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화하고 고쳐야 하는 그 무엇이,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이 세상이나 연옥에서 갚아야 할 「잠시적인 벌」이다. 교회가 은사와 신학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와 같이 잠시적인 벌, 혹은 갚아야 할 빚이다. 다시 말해 은사는 완전한 정화의 시간을 줄여 주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473항 참조).

이렇게 볼 때 은사는 철저하게 법적인 것이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도덕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범죄에 상응하는 만큼의 벌, 곧 일정한 기간 동안 수감되어야 하는 벌을 받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은사의 교의가 단순히 외적인 사실로 축소되어서는 안되며, 루터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은사가 시행되어서도 안된다. 은사가 지니고 있는 원래의 정신은 지은 죄에 대해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기워 갚음으로써 참회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 역사에 있어 참회는 대체하는 형태와 연결되어 있었다. 곧 네가 만일 어떤 사람을 속였다면 네가 속인 사람을 위해 네 시간을 제공해야 하며, 네가 만일 30일간 단식을 해야 한다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그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30그릇의 식사를 대접하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회가 은사의 교의로 제안하는 것은 교육적인 성격, 형제간의 교정을 위한 사회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은사가 목표하는 바는 죄인으로 하여금 그의 잠시적 벌을 면죄 받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신앙을 돈독히 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년을 잘못 이해하고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에 반포한 교황령(Indulgentiarum doctrina)을 통해 은사는 참된 회개와 밀접히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느님과 참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은사를 얻을 수 없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975년의 희년을 기념 하면서 전면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은사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행위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성체를 해야하고 교황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참으로 회개했다는 표시로 모든 죄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박영식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