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대희년을 배웁시다 (9) 교황 보니파시오 8세부터 보니파시오 9세까지의 그리스도교 희년(1300~1390년)

박영식 요한 신부(가톨릭대학교)
입력일 1999-05-30 수정일 1999-05-30 발행일 1999-05-30 제 2153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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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보니파시오 8세

1300년 첫 희년 선포, 20만명 이상 순례

▷ 교황 클레멘스 6세

50년마다 희년…라떼란 대성전도 순례

▷ 우르바노 6세

모든 세기의 33년을 희년으로 정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1300년 2월 22일에 교서 (Antiquorum habet)를 반포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희년에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사도 바오로의 성전을 순례하게 했다.

그의 희년 선포는 교회 안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로마인들 외에도 20만명 이상의 순례객이 희년 행사에 참석했으며(당시 로마 주민은 약 2만명이었다) 순례객 가운데는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도 끼어 있었다고들 말한다. 사실 단테 자신이 이 때의 희년에 참여한 것으로 묘사하지만(연옥편 Ⅱ, 94~99) 확실치가 않다. 여하튼 단테는 그의 '신곡' 지옥편에서 이 희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치 성년(聖年)에 들이밀리는 사람들 때문에

로마 시민들이, 많은 무리가

다리 위로 가도록 마련하여서

이편 사람은 모두 이마를 '성(城)'을

향하여 산또 뻬뜨로로 가고

다른 편은 '산'을 바라보고 가는 것과 같더라 (ⅩⅧ, 28~33).

그 당시, 시내에서 베드로 성전으로 가는 유일한 다리는 떼베레강을 가로지르는 성 안젤로 다리였다. 로마인들은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수많은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이 다리의 반을 갈라 각기 '일방통행' (로마에서의 첫 일방통행의 예!)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 쪽 길에는 베드로 대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다리 건너 편에 있는 성 안젤로 성을 향해 이마를 하고 있고, 다른 한 쪽 길에는 베드로 성전에서 떠나오는 사람들이 이마를 요르단 산(작은 언덕이었으나 택지로 바뀌면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을 향하여 걸었다.

보니파시오 교황이 선포한 희년은 히브리 전통의 희년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나,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무한한 공로를 강조하고 죽은 이들에게 은사를 적용하면서 히브리 전통, 특히 마카베오 하권에 씌여 있는 전통이 계속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보니파시오 교황의 후임 교황들은 희년 때 로마를 순례하는 경우, 그 기간과 실천 사항들을 낱낱이 규정했다.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서를 반포하여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성전을 순례하는 것 외에도 라떼란 대성전을 순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희년을 100년마다 지낼 것이 아니라 50년마다 지낼 수 있도록 정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두 번째 희년은 1350년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교황은 아비뇽에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희년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 희년은 교황 우르바노 6세가 1389년 4월 8일에 교서를 반포하여 같은 해 12월 24일부터 1390년 12월 24일까지 유효한 것으로 선포한 '구원의 희년'이다. 그는 희년 때 순례할 성당을 성모 대성전(싼따 마리아 마죠레)을 첨가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기억하면서 모든 세기의 33년을 희년으로 기억하도록 정했다. 하지만 우르바노 6세 교황은 1389년 10월 15일에 서거했기 때문에 그의 후임자인 보니파시오 9세가 1390년의 희년을 기념했다.

박영식 요한 신부(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