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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이 땅에 빛을] (3) 정하상,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시작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9-02-08 수정일 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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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 핍박 견디며 한국교회 초석 다진 평신도
교황청에 서한 보내 성직자 파견 요청 … 조선교구 설정에 큰 역할

조선 첫 사제인 모방 신부·2대 교구장 엥베르 주교 조선 입국 도와

1839년 9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4세 나이로 순교

순교자 성월 9월의 달력을 펼치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본다. 김대건 성인의 이름 옆에 정하상 성인이 나란히 있다.

김대건 성인과 함께 이야기될 만큼 정하상 성인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정하상 성인에게 한국 평신도의 방점을 찍을까. 103위 시성 25주년의 해를 맞아 오늘날 정하상 성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본다.

■서소문 밖

서울 의주로와 아현고가가 교차되는 지점.

서소문 밖 순교터는 이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소문. 현재 이곳에서 다소 떨어진 서소문공원에는 서소문 밖 목숨을 바쳤던 그들을 기리기 위해 순교자 현양탑이, 중림동성당에는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져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44명의 이름을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본다. 많은 성인들 중에 한국 평신도의 시작, ‘정하상 바오로’. 그가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아버지는 정약종. 정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중형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아버지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도층 신자로 활동하다 신유박해로 체포돼 순교했다. 박해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만 6살. 모친 유조이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이 기울자 모친 유조이는 정하상·정정혜 남매를 데리고 마재로 가서 생활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집안의 비난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정하상은 고통을 굳센 신앙으로 극복한다.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를 배우며 충실한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한다.

청년기에 들어서 교회 재건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도를 구했다. 당시 그가 생각했던 재건 방법은 무엇보다 새 성직자를 조선에 오게 하는 일이었다.

정하상은 만 21세때인 1816년, 북경으로 떠난다. 당시 조선에서 정하상을 돕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부부로 유명한 조숙(베드로)과 권데레사(권일신의 딸)가 있었다. 이후 순교자의 후손인 이경언(바오로)과 현석문(가롤로) 등이 그를 돕는다.

1824년, 그는 역관 출신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을 만난다. 그들은 함께 북경선교사를 만나고 귀국한 뒤 교황에게 서한을 올린다. 이것이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다. 여기에는 조선 교회의 비참한 상황과 성직자 파견요청의 내용이 들어있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조선 교우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전달됐다. 1831년, 마침내 조선 포교지가 조선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정하상의 활약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오던 도중 병사하자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1836년 정하상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한다. 하지만 정하상은 다시 조선 신학생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한다.

1837년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했다. 신학생으로 선발돼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는 체포와 순교를 예상하고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직접 작성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상재상서’다.

정하상은 그해 7월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이후 상재상서를 박해자들에게 제출하고 동료들과 문초를 받는다. 이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도 차례로 체포된다.

정하상은 추국을 당하지만 동요하거나 나약한 신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교·신부들과 대질신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1839년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했다.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평신도의 자랑스러운 이름

정하상의 이름을 다시 손가락으로 짚는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아닌 오늘날 평신도의 모습이다. 작은 평신도인 그가 조선교구를 설정하게 하고 네 명의 성직자를 조선에서 활동하게 했다.

정하상.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이름 석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 많은 순교자 배출한 정하상의 나주 정씨 가문

정하상의 정씨 집안이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본관은 나주, 당색은 남인이다. 우선 정하상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어머니 순교자 유조이(체칠리아)가 있다. 또한 순교자 정철상(가롤로)의 아우이자 성녀 정정혜(엘리사벳)의 오빠이기도 하다.

천주교에 입교할 때도 그의 중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당시 정약용(요한) 또한 천주교 신자였다.

▤ 정하상의 ‘상재상서’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 비판에 대응

1839년 정하상이 지은 그리스도교 호교론서다. 상재상서는 비록 3644자로 이뤄진 짧은 내용이지만 논리는 명쾌하다. 그는 이를 통해 조선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그는 천주교의 효론(孝論)을 바탕으로 제사폐지 문제를 극복하면서도, 동양의 윤리관을 존중하려고 고심했다. 이러한 점은 전통사상과의 합일 또는 교리의 토착화로 설명된다.

이와 같은 상재상서의 내용은 부친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의 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훗날 안중근(토마스)의 교리 이해에 많은 영향을 준다.

사진설명

▲정하상(맨 오른쪽) 성인과 동생 정정혜 성녀(맨 왼쪽)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순교와 집안의 비난·핍박으로 고통 받았지만 굳센 신앙으로 극복했다. 두 성인의 신심은 어머니 유조이(가운데)에게서 배운 교리의 영향이 컸다.

▲서소문공원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에는 박해 당시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성인들을 기리기 위한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839년 정하상이 순교한 서소문 밖 형장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