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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24) 칸딘스키의 ‘최후의 심판’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1-18 수정일 200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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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얘기를 한다”

선적 율동과 자유로운 색채로 ‘최후의 심판’ 재현

추상적 표현은 관람자에 무한한 해석의 자유 선사

얼마 전 수업 시간 중 잠깐의 휴식 시간에 학생들과 가벼운 얘기를 나눴는데, 어느 학생이 자신의 친구가 나를 보았는데 ‘눈빛이 너무 강렬하다’면서 호들갑을 떨며 말하더라고 전했다. 한 10년 전만 해도 가끔씩 ‘눈이 반짝 거린다’거나 ‘눈이 빛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 나이를 먹으니 내면이 억세져 ‘강렬하다’는 말을 듣게 된 것 같아 그다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세월 따라 좋은 경험, 나쁜 경험, 억울하고 한스러운 순간들이 가슴 속에 차곡차곡 포개지면서 사람은 강해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성격이 급한 편이고 자제력이 약해서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품기보다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깥으로 폭발시켜 버리는 편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인지 약간의 변화가 오는 것 같다.

주변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후회가 되고 기분이 언짢다.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이 이래서 생겼나 보다. 주변을 보면 말이 많고 수다스러운 사람보다 말없고 냉소적인 사람이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20세기 초, 대표적인 화가 칸딘스키는 ‘침묵이 다변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한다’고 주장하며 추상미술을 탄생시켰다. 구상미술은 형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만, 추상미술은 원, 삼각형, 사각형 등의 형태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수 세기 전 조토, 미켈란젤로 등이 그린 ‘최후의 심판’을 칸딘스키는 추상으로 재현하였다. 그의 ‘최후의 심판’에는 절대자인 하느님, 나팔을 부는 천사, 심판의 두려움에 아우성치는 인간 등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어떤 형상도 없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극적인 사건에 대한 두려움의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 듯 한 긴장감, 장엄함, 절망, 공포, 두려움 등을 느낄 수가 없다.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경쾌하고 율동적이다. 여기에는 선적 율동과 자유로운 색채 구성만이 있을 뿐이다.

선과 색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조화의 구성이 이야기적 서술성을 제거하고 있다. 칸딘스키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미켈란젤로, 조토 등 옛 거장들이 성경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칸딘스키는 애초부터 성경이나 예수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설령 성경 말씀에 관심이 있었다 할지라도 성경의 이야기를 재현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구상적 형상으로 재현된 ‘최후의 심판’을 보면 그 그림이 제시하는 장면 이외의 것을 상상하는 데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추상화된 ‘최후의 심판’을 볼 때는 무한히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굳이 성경의 구절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매순간 느끼는 위기가 바로 최후의 심판이 아닐까. 칸딘스키는 관람자가 추상적으로 표현된 최후의 심판을 보고 해석의 무한한 자유를 갖도록 만든다.

즉 성경의 말씀을 떠올려도 좋고 다른 것을 상상해도 무방하다. 칸딘스키의 선과 색채의 자율성은 회화를 무한히 자유롭게 했다. 칸딘스키는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나 문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상적인 형상을 물질적이라 주장했고, 추상적인 형태는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형태요소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므로 구상적 형태의 파괴는 필수적이다. 그는 ‘재앙은 성자처럼 찬양 된다’라고 주장하며 구상적 형태를 파괴하고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추상이라는 새로운 회화의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딘스키는 회화가 자연을 재현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회화는 누군가의 얼굴을 담고, 자연의 어느 한 부분을 담았다. 마치 회화는 자연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그러나 추상회화의 등장으로 회화는 자연의 종속에서 해방되게 된다.

회화는 더 이상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며 신화나 전설, 성경 등의 문학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도 아니다. 회화는 회화일 뿐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성경이나 문학적인 내용을 전달하거나 자연을 재현하는 역할을 하는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회화는 회화로서 완벽한 독립된 세계라는 것이다.

회화는 자연과 동등한 독립된 세계다. 회화는 수다스러운 이야기의 서술이 아니라 무언의 침묵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말 없는 시선이 얼마나 풍요로운 감정과 언어를 담고 있는가. 그는 추상미술의 근간이 되는 기하학을 가장 침묵하는 형태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라오콘에 의하면 사과는 얼마나 조용하며 한 개의 원은 더욱 조용하다. (…) 침묵이 수다보다 훨씬 더 다변이고 무언이 말을 막힘없이 시원스럽게 하는 웅변보다 낫다’

김현화(베로니카·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바실리 칸딘스키. 그는 현대미술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꼭 만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지난해 2~3월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칸딘스키-러시아 거장전’이 열렸다.

거장전이라고 기대한 것에 비해 전시 동선이나 환경이 미흡했지만, 대중들이 회화에 관심을 갖는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라는데 의미를 두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김연아 선수 덕분에 비인기 종목에 가까웠던 피겨스케이팅의 인기가 급상승한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할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양하게 열리는 유명 작가전의 일차적 역할이 그러할 것이다.

현대 추상미술의 스타는 단연 칸딘스키다.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인 칸딘스키는 앞날이 보장된 법학교수직을 포기하고 미술에 입문했다. 30세 늦깎이 나이였다.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 그림에 매료된 것이 그 계기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칸딘스키가 추상회화를 탄생시킨 일화도 유명하다.

칸딘스키는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작업실로 들어서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본다. 도대체 누가 저 그림을 그렸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와 살펴보았더니 자신이 외출하기 직전 그렸던 그림이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거꾸로 벽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거꾸로 보인 그림에서는 자연의 외형과는 관계없는 선과 색, 형태의 조화와 구성 그리고 감동이 있었다.

이후 활동은 칸딘스키를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했다. 그는 추상미술의 이론적 근거를 세우고 추상미술과 관련한 필독서이자 영원한 고전이 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라는 저서 등도 집필했다. 대개 추상회화는 어렵다고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많은데, 추상회화에 있어서는 작가도 관람객들도 그림 자체도 자유롭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림설명

칸딘스키, '최후의 심판', 1912, 유리에 먹과 수채, 33.6 x 45.3,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