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취재 현장속으로] 산재사목 펼치는 정점순 수녀의 하루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08-11-23 수정일 200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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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우 아픔 돌보면서 겸손·희망 배웁니다

“나 스스로도 많이 변했어요. 기다림을 배우고, 희망이 없는 가운데 희망을 갖게 됐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망의 학교로 환자들은 매일 나를 인도합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위원장 허윤진 신부) 산재사목실.

남구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을 지나 아주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가정집 정원 한 켠, ‘성가정상’이 놓여있고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이 함께 산재환자들을 밝은 웃음으로 맞이했다.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산재사목은 계속돼야 한다’는 정점순(세실리아) 수녀의 바쁜 하루를 쫓았다.

만남Ⅰ

오전 10시. 정수녀가 산재 환자들과의 ‘만남’이 있다고 했다. 수녀복을 입지 않는 프라도회 소속이라 그는 단정한 옷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었을 뿐이다. 자칭 ‘영락없는 아줌마’라고 했다.

6명의 환자들이 산재사목실에 들어선다. 생활 나눔을 하기 위해서다. 몸짓과 웃음이 해맑다.

“수녀님, 안녕하세요?”

정수녀는 산재환자들 중 ‘99%’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산재환자들은 그를 ‘엄마’처럼 따른다. 법적인 자문을 구하는 것도, 병원비 문제도, 가정 상담도 모두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였잖아. 집에 숨어있지 않고 진짜 마음이 우러나서 스스로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감싸줘야 해요.”

한 환자가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모두 똑같다. 손가락이 없거나, 손목이 없거나, 발목이 없다. 화상을 입거나, 심한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오고가는 대화 또한 다르다.

“나는 ‘발목’이라서 산재등급이 그리 높지 않아요. 면목동 사는 000씨는 ‘손목’이라 등급이 높잖아?”

정수녀가 ‘통증’에 대해 묻는다. 산재환자들의 고충은 수술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수술 후 심각한 통증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육체적 고통은 심적 고통으로 이어지고 우울증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밤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고 눈을 뜨면 그날은 날 새야지. 통증 오면 정말 딱 죽고 싶어. 미치는 거야, 그 순간부터.”

만남Ⅱ

6명의 환자들이 문을 나섰다. ‘안녕하세요’로 시작된 만남이 ‘안녕히 계세요’로 끝났다.

“신자는 아니지만 종교를 절대 강요하지 않아요. 그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에요. ‘나눔’이란 단어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지요.”

수녀복을 입지 않아 ‘아줌마’ 소리를 듣고, 천주교에 관심 없다는 소리와 함께 환자들에게 박대를 당하면서도 그가 ‘산재사목’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다.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다.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다른 삶을 살아야하는 산재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가정’은 의지만으로 지켜내기 버거운 문제다.

“나 스스로도 많이 변했어요. 기다림을 배우고, 희망이 없는 가운데에서 희망을 갖게 됐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망의 학교’로 환자들은 매일 나를 인도합니다.”

그는 지역교회와 연계해 산재환자들을 돌보고 산재예방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산재사목에서는 정수녀를 포함한 담당자 3명만이 산재환자들과 진폐증환자들을 위한 생계비·의료비 지원, 문화탐방, 상담 등을 하고 있다.

오후 1시. 어르신 8명이 ‘건강교실’을 위해 산재사목실을 찾았다. 정수녀가 환한 웃음으로 어르신들을 맞이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전직 광부출신으로 진폐증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수녀가 펜을 들고 휴업급여와 진폐법에 관해 칠판에 썼다.

“진폐증 앓고 있으면서 이것도 몰라서야, 원.”

어르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만남Ⅲ

오후 5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 도착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방문한 환자는 김광연(요셉·77) 어르신. 진폐증을 앓고 있다. 아내 김영자(루치아·71)씨가 정수녀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그간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법적 자문과 주의사항은 물론 가정사를 챙겨 듣는 것도 그의 몫이다. 가정의 어려움을 알고 보호자를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한 번 병원을 찾으면 20여 명이 넘는 환자와 보호자를 만난다고 했다.

“보호자들의 우울증 문제도 심각해요. 예전에 병원에서 성경나눔시간을 가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하반신마비 산재환자가 오줌이 흐르는데도 그냥 계세요. 작은 공간에 그렇게 25명이 모여서 나눔을 했죠.”

오후 7시. 녹색병원을 나섰다. 해가 저물어 주위가 깜깜해졌다. 면목동 근처에 방문해야 할 산재환자 가정이 남아 있다고 했다. 가정을 직접 방문해 환자들의 환경을 알아보는 것도 정수녀의 몫이다.

“환자와 의사, 정부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지요. 그 사이에서 ‘사목’을 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에요. 하지만 이 안에서 나는 ‘희망’을 보고 ‘믿음’을 봅니다.”

면목동 한 시장. 시장통 끝에 있는 조그마한 지하방을 방문한다고 했다.

정수녀와 인사하며 돌아서는 길. ‘뭘 사가야 할 텐데…’라며 아줌마처럼 두리번거리던 그가 돼지고기를 한 근 샀다. 곱게 맨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였다.

사진설명

▲자그마한 가정집 한 켠에 마련된 서울 노동사목위 산재사목실에서 정점순 수녀가 밝은 웃음으로 산재 환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산재 환자의 손을 꼭 잡는 정수녀. 산재환자들 대부분이 신자가 아니지만, 그들은 정수녀를 ‘엄마’처럼 따른다.

▲병원에 입원중인 산재 환자들을 만난 정수녀. 법적 자문, 주의사항은 물론 그들의 가정사를 듣는 것도 정수녀의 몫이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