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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18)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 습작’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8-10-12 수정일 200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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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의 잔혹한 본성”

예수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

존엄성 상실당한 현대인의 존재적 위치 형상화

요즈음 웰빙 개념에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고 육식을 줄여야 된다고 강조하지만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못하면 왠지 힘이 없고 허전하다. 난 그다지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채소만 먹고는 못 살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산 소고기 파동으로 TV에서 자주 비추어준 피부가 벗겨지고 사지가 묶여 줄줄이 걸려 있는 소고기 작업장 장면을 보고 나니 고기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과연 소, 돼지 등의 동물을 채소, 과일처럼 먹거리 개념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옳을까. 동물은 생물학적인 기능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기쁨, 슬픔,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갖는다.

소, 돼지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까. 결국 우리가 식탁에서 맛있게 먹는 고기는 죽음의 징후로 공포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갔을지도 모를 동물의 시체이다.

때로 인간도 전쟁, 테러, 정신병적인 살인자들에 의해 동물이 도살당하듯 살점이 찢겨지는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기도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죽은 사람을 해부해서 고깃덩어리로 정육점에 걸어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나는 푸줏간에 갈 때마다 짐승 대신에 내가 거기에 걸려 있지 않음을 알고는 늘 놀라곤 한다”며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했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도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그는 여러 점의 ‘십자가 책형’을 그렸고 그 중 1962년에 발표한 ‘십자가 책형 습작’이란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왼쪽 패널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고, 화면 아래에서 해부당한 뼈 골격 형상이 밀폐된 공간 안으로 서서히 침투되어 들어오고 있다.

이 형태와 유사한 형상이 중간 패널과 오른쪽 패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패널에서는 도살당해 정육점에 걸려 있는 듯한 벌건 고깃덩어리가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설마 그리스도를…’ 이렇게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베이컨은 이 형상을 그리면서 피렌체에서 본 치마부에(Cenni di Cimabue, 1272~1302)의 ‘십자가 책형’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의 형상은 치마부에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거꾸로 본 모습으로 변형한 것이다. 베이컨은 왜, 무엇 때문에 신성한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할 것일까.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무신론자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지 않았다. 그럼 그가 신성 모독이라도 하기 위해 이렇게 끔찍하고 구토증 나는 형상으로 예수를 표현한 것일까.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 사건을 종교적인 문맥에서 이탈시켰다. 그는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성경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을 예수의 개인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본능에 내재된 잔혹성의 광기가 야기시킨 보편적인 인류의 사건으로 인식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문구에서 예수라는 인물을 삭제한다면 주인공은 우리 모두가 해당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제든지 십자가에 책형당할 수 있고, 우리 모두 이데올로기, 사상, 종교 등의 이질성을 이유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잔혹성을 가지고 있다. 잔혹성은 광기다. 광기는 죽음의 징후다. 그러므로 베이컨이 던지는 화두는 잔혹성이다.

본능적인 잔혹성으로 죄 없는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며 소리 지르고 피의 축제를 즐기는 자도 인간이고, 제물이 되어 희생당하는 자도 인간이다. 십자가 책형은 서로 모함하고, 살인과 방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있는 인류 역사의 동물적 본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가해자의 잔혹성은 피해자의 극단적인 공포를 수반한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십자가의 죽음을 순명으로 받아들인 예수 역시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하늘을 향해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소리치며 절규했다. 누구도 예수의 절규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외롭게 죽었다. 예수께서 죽음의 징후 앞에서 느낀 극한의 공포와 고독이 살육당한 짐승의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다. 사실 베이컨이 제시하는 종교화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십자가 책형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에 책형 당하듯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고깃덩어리가 된 예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베이컨은 존엄성을 상실당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적 위치로 고깃덩어리가 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그리스도교인인 나는 이 그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극단의 고통과 치욕을 스스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며 가슴 떨리는 전율을 느낀다.

김현화(베로니카·숙대 미술사학과 교수)

Tip

몇달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900억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된 그림이 있었다. 전후 현대미술 최고가를 경신한 이 그림의 작가는 영국인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은 현대회화의 궁극, 완결판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화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베이컨은 초등학교 이후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미술에서 유일한 위안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피카소의 작품은 베이컨이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독학으로 예술세계에 뛰어든 그는 술집 사환, 요리사, 도박꾼, 전화교환수, 실내장식가 등을 전전하며 실력을 다져갔다.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한 경험이 있는 일반인들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한 캔버스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거나, 고개를 돌려버린 기억들도 있을 듯 하다. 이미지를 파괴시키고, 변형과 해체를 일삼은 그의 회화는 피카소의 회화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피카소의 작품에서는 유희에 가까운 쾌감이, 베이컨의 경우 경악과 같은 감정이 두드러진다.

베이컨은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는 문제를 표현할 때면 더욱 생생하게 뒤틀린 형상들을 앞세운다. 몇몇 평론가들은 베이컨은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에 서로 먹고 먹힐 수 있는 살덩어리라는 사실을 소름끼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일상 속에 잠재된 야만과 폭력을 극적으로 재현해 낸 베이컨 덕분에 관객들은 편안히 서서 작품을 구경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뒤틀린 형상들을 앞세워 던진 가혹한 물음들은 점점 더 생생한 빛으로 살아나 우리를 끊임없이 전율시킨다.

그림설명 : 베이컨, '십자가 책형 습작', 1962,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삼부작, 각 판넬, 196×145cm,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