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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보는 교회 미술 산책] (15) 카라바조의 ‘부르심을 받은 성 마태오’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8-08-03 수정일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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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입니까, 저를 부르십니까?”

명암의 차이로 ‘빛의 예수님’-‘어둠 속의 마태오’ 대비

17세기 유럽화가들에게서 유행한 카라바조 명암법 창안

어두침침한 실내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화면 왼편에는 탁자 주변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한 젊은이는 열심히 동전을 세고 있고, 곁에 있는 노인은 젊은이가 돈을 잘 세고 있는지 안경 너머로 지켜보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입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 중 손을 쭉 뻗으며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이시다.

이 그림은 예수께서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라며 마태오를 제자로 삼았다는 마태오 복음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그림 안에서 “저요?”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바로 마태오이다.

이 그림을 대하는 순간 인상적인 것이 두 가지쯤 되는데 첫째는 그림이 무척 어둡다는 것이고, 둘째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빛이다. 빛은 예수님이 막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오른편에서 시작되어 마태오와 주변 인물들을 비추며 마무리되고 있다. 여기서 빛은 마태오가 사람들의 눈총을 받던 세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변신하는 은총의 순간을 가장 극적으로 만드는 회화요소이다.

화가는 빛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실내의 벽을 어둡게 칠한 후 모델들을 세워놓고 그렸다고 한다. 17세기 내내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럽의 화가들에게 강렬한 빛의 대비를 유행시킨 카라바조의 명암법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그림이 놓여 있는 장소에 실제로 가서 보니 그림 오른 쪽 위로 창이 있어서 현실 속의 빛이 그림에 비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실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을 일치시킴으로써 그림을 더욱 실감나게 만든 것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림이 그려졌던 당시의 로마 시민의 복장이라고 한다. 천오백년 전 예수님 생존 당시의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서 막 벌어지고 있는 듯이 생생하게 풀어놓기 위해 인물들과 그림의 배경을 당시의 것으로 바꾼 것이다.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는 남자는 열두 제자의 우두머리 베드로인데 그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고 뒤통수만 보이는데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보니 안 감은지 족히 2주는 되어 보인다. 비록 성인이지만 멋지게 장식하거나 위엄있게 그리지 않고 하층민의 중년의 남자로 그린 것이다.

하긴 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였으니 이렇게 그리는 것이 훨씬 더 사실에 맞는 일일 것이나 당시에는 성인이나 성경 속의 인물은 위엄있게 그리는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에 카라바조의 그림을 대하는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곳은 로마의 한복판에 있는 성 루이지 프란체시라는 성당이다. 카라바조는 약 26세 정도 되었던 1599년 이 작품을 주문받았다. 그때까지 그는 로마에서 활동하던 평범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이 그림을 완성한 후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필자는 몇해 전 카라바조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 로마의 성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의 겉모습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로크 식 건축물이었으나 어떻게 알고 왔는지 교회 안은 이 유명화가의 작품을 보기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오랫동안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님을 만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 한 점의 명작이 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성 마태오의 소명’, ‘성 마태오의 순교’, ‘집필하는 성 마태오’ 등 카라바조의 대표작을 여러 점 볼 수 있으니 관람객들이 넘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카라바조는 17세기 바로크 시대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주인공으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와 같은 동시대 거장들이 바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명암법에 관한 한 이 화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바로크 화가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38세라는 짧은 생을 산 그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다. 타협을 거부했고, 성질이 불 같았던 그는 크고 작은 싸움에 말려들었고, 급기야는 공놀이를 하던 중 사소한 말싸움으로 살인을 하게 됐으며, 이후 죽기 전까지 도피생활을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피난처마다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체포를 피해 나폴리, 시칠리, 말타 등 이탈리아 남부와 지중해 남부의 섬나라를 떠돌았는데 오늘날 이들 도시에 가면 그가 남긴 작품들이 남아 있어서 그의 말년의 작품세계를 추적할 수 있다. 필자는 유독 이 화가의 작품을 좋아하여 그의 작품이 있는 미술관을 거의 다 가 보았으며 지중해 남쪽 말타까지 가서 그의 마지막 작품들을 보는 행운을 누렸다.

카라바조는 렘브란트보다 덜 유명하고, 반 고흐보다는 덜 치열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예술혼은 두 화가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고종희(마리아, 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Tip

어두움 속에 한줄기 조명이 밝혀진다. 검은 장막을 한켠씩 걷어내며 어둠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드러낸 주인공들. 뜻밖에 그 모습은 사진속 인물처럼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카라바조의 캔버스는 잘 연출된 무대와도, 잘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과도 흡사하다. 이러한 카라바조의 작품은 오랜 세월 어둠에 갖혀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의 천재성은 새로운 빛을 받았다.

그의 극적인 조명과 사실적인 묘사는 바로크 양식의 탄생을 지지했다. 색과 명암을 풍부하게 묘사한 색채, 음영과 질감의 대비 효과 등은 이후 루벤스, 렘브란트, 반다이크 등에게로 이어진다. 가장 자연스러운 ‘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평가는 인위적인 빛을 만들어 명암법을 제시한 화가로서 아이러니한 면이기도 하다. 특히 카라바조는 2차원적 평면에 ‘깊이’를 부여한 최초의 서양화가로 일컬어진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한세대 앞서 살았던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구별하기 위해 그의 고향 이름을 붙여 불리웠다.

“미켈란젤로(카라바조)

죽음과 삶은 그대에게 잔인한 음모를 꾸몄네

삶이 두려웠기에

그대의 붓은 모든 것을 넘어셨지

그대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니라 창조를 했지

죽음은 분노의 불길로 타올랐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기다란 낫 같은 그대의 붓을 통해 잘려졌던가

그리고 그대의 붓은 더 많은 것을 창조했다네”

39세의 젊은 나이에 객사한 카라바조를 애도하며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마리노 기사가 지어 읊은 시다.

그의 작품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길 원하면 책을 접해도 좋을 듯 하다.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김성근 지음/ 평단)은 6장에 걸쳐 카라바조의 작품을 다채롭게 담고 있다. 부록에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옛 문헌 등도 소개한다.

그림설명 : 카라바조, '부르심을 받은 성 마태오'. 1599-1600, 322 x 340 cm, 캔버스에 유채, 로마, 성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