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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80장면] 72.신유박해 200주년 기념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8-06-08 수정일 200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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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기념사업 통해

순교자들의 정신 되새겨

"새 천년기와 더불어 시작되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교회사에 귀중한 이정표가 될 순교 신심을 되살리는 새로운 도정에 오른다.

교회는 한국 천주교에 첫 번째 대규모 순교자를 안겨준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오는 2월 2일부터 2002년 2월 4일까지 1년 동안 이어지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기간’에 공식 돌입한다. 이에 맞춰 교회는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개최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순교자들의 삶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신앙의 스승이요 모범인 순교자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장을 마련해 나간다.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1월 11일 오후 6시 교구청 소회의실에서 2001년도첫 회의를 열고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사업 행사 시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2월 2일 오전 11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봉헌되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공식일정에 들어간다. 또 이날 오후 2시 명동 가톨릭회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리는 기념 심포지엄은 신유박해 연구의 현재와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의 현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1일자)

한국 교회 최초의 대규모 박해이자 한국교회의 4대 박해 중 하나인 신유박해가 발생한지 꼭 200년이 되는 2001년, 한국교회는 박해 2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새로운 시복시성을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신유박해가 교회 안팎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한국교회사에서 첫 번째 대규모 순교자를 낳은 공식 박해라는 점. 하지만 신유박해의 순교자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103위 성인은 물론 한국교회의 부모이고 스승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4대 박해인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 중에서 한 명도 순교성인을 배출하지 못한 박해는 신유박해 뿐이다. 이는 신유박해가 첫 공식 박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오히려 신앙의 가장 선조들이 올바른 현양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새로운 천년기에 접어들면서 반성적 성찰과 함께 시작된 다양한 신유박해 기념 사업은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 역사를 합당한 평가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의미를 아울러 갖고 있다.

신유박해가 발생한 것은 1801년, 천주교 금지교서에 따라 전국에서 3백명 이상이 순교하게 되는데, 이 박해로 초기 교회의 중추 역할을 했던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낙안 등이 10월 8일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다. 이에 앞서 주문모 신부가 3월에 자수해, 4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했다. 어렵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너무 빨리 닥친 시련으로 지도급 인사들을 잃게 됐고,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남은 교인들마저도 유배되거나 산간벽지로 피신해 한국교회는 빈사상태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사업이 시작된 2001년은 때마침, 은총의 대희년을 막 지낸 시점이었다.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기념 기간인 2월 2일부터 이듬해 2월 4일까지 대희년을 맞아 베풀어진 전대사 기간을 연장함으로써 신유박해를 한국 신자 모두의 기념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 기간 중 거행된 다채로운 기념행사들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삶으로 실천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2월 2일 개막미사로 시작된 기념행사는 심포지엄, 신앙대회 및 다양한 문화행사들로 치러져 한 해 내내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념하는 은총의 기간이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