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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면희 교수의 생명칼럼] 2.풍요 이면의 환경문제

입력일 2008-01-20 수정일 2008-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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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거스르는 생활양식 전환하자

오늘의 인류는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한껏 누리고 있다. 예전 결핍 상태의 사회 구성원들이 빈곤과 굶주림을 겪던 때와 비교해보면,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풍요를 마냥 반길 만하지 않다는 것이 현대인의 또 다른 고민이다. 왜냐하면 산업화의 심화로 구현되는 풍요로움 이면에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가 수반되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문제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별할 수 있다. 첫째, 산업화 성장의 귀결로서 생태계 파괴가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지구 생물권의 생명부양체계가 취약해지고 있다. 이미 산업화 이후 지구 생물 종의 5분의 1 이상이 멸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열대림 상당수도 개발로 사라졌으며, 기후온난화로 인해 지구상의 기상이 급변함으로써 남북극의 얼음도 100년이 지나면 사라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둘째, 석유와 석탄, 우라늄과 같은 화석연료를 빠른 시일 내에 소모함으로써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고갈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2007년 10월 독일의 비영리 에너지 연구기관인 에너지워치그룹은 2006년에 세계 원유 생산이 정점에 이르렀으며 해마다 7%씩 줄어 2030년이면 지금의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수치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천연가스와 우라늄은 향후 50년, 그리고 석탄은 120년 정도면 고갈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쓸모 있는 에너지가 인간에 의해 사용되면서 쓸모없는 에너지로 변하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산업화 활동으로 인해 오염요인이 배출되어 인간 생명에게도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다. 과거 산업공단의 공해는 노동자와 인근 주민의 생명을 무수히 앗아갔거나 질병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바 있다. 특히 최근에는 두 가지 차원에서 가장 위협이 되고 있다. 하나는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자연재해로 나타나 인류에게 시시각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여름 미국을 덮쳐서 수많은 인명과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피해를 입힌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대표적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일 개발되어 쏟아지는 산업화 제품의 화학물질이 자연으로 흘러들어 동식물 생명체에게 축적되고, 그것이 먹이사슬 체계에 따라 인간에게도 부메랑처럼 되돌아옴으로써 인류의 생명과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환경호르몬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이하여 1987년에 발표한 회칙 ‘사회적 관심’ 34항에서 세 가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음을 주지시킨 바 있다. 첫째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동물, 식물, 자연 요소들-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인간이 자기 원대로만, 자기의 경제적인 필요에만 의거하여 사용할 수는 없으며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자각을 더욱 깊이” 얻어야 하고, 둘째 “자연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자각”을 해야 하며, “공업화의 직접 또는 간접 결과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게 환경의 오염이 조성되고 그것은 주민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함을 인식시키고 있다.

오늘의 환경재난은 물질적 성장만을 도모하는 산업화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우연적이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이다.

즉 콘크리트 아파트와 빌딩에서 거주하는 현대인이 산업공단에서 생산된 각종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고자 자연과 논밭 등 경작지에서 자원을 추출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며 폐기하는 과정에서 재난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존 산업화 제도와 생활양식이 문제의 직접적 뿌리인 셈이다. 이렇게 구조적 요인에 따른 환경적 폐해는 단계적으로 심화되면서 미래세대 인류에게도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현세대인 우리는 우리 자신과 미래세대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서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사회제도와 생명 죽임의 생활양식을 전환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면희(프란치스코·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