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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교회가 간다 Ⅲ] 연대를 향해 6.마테오 리치를 통해본 아시아복음화 노력의 과제와 문제점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7-09-23 수정일 20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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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다종교 존중하며 ‘대화’로 선교

아시아 복음화를 이야기 할 때 신학자들은 특히 ‘마테오 리치’에 주목한다. 마테오 리치로부터 아시아 복음화의 단초가 풀렸고, 특히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줄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영향력은 마테오 리치의 위대성과 함께 그가 안고 있는 한계성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영향력이다. 마태오 리치의 위대성은 따라잡지 못하고, 그가 안고 있는 한계성만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황종렬(레오, 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박사는 “아시아 복음화를 이야기 할 때 현재가 아니라 전통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며 “지금의 중국, 혹은 아시아 복음화 여건은 마테오 리치가 복음을 전하던 당시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 중국 복음화의 걸림돌이 단순히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문제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황박사는 특히 “중국과 일본, 한국은 서구 식민지배식 선교가 통하지 않은 나라들”이라며 “아시아는 무력 혹은 전투적 선교 방식으로 복음화 되는 대륙이 아니다”고 말했다. 황박사는 이를 위해 ‘역사(歷史)’를 이야기 했다. 역사 속에서 아시아 복음화의 교훈을 들여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황종렬 박사가 말하는 마테오 리치의 동아시아 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오늘날 아시아 복음화 과제, 그리고 그 과제를 위한 아시아 교회간 연대 단초들을 찾아본다.

‘문서선교’와 ‘문화교류’

마테오 리치는 아시아 복음화의 구체적 방법으로 ‘문서 선교’와 사회적 우애를 형성하는 ‘문화 교류’를 선택했다. 또한 아시아의 종교 사회 관습에 대한 존중 정신도 주목할 만하다.

문서선교 형태는 특히 적절한 신앙 증거 방식이었다. 리치는 옥외나 넓은 실내 공간에서 신앙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설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아시아인들의 심성과 유교 학풍에 부합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저술을 하게 된다.

특히 ‘천주실의’는 그가 중국 선교에 투신한 이래 이룬 가장 주목할 만한 선교 신학적 성과였을 뿐 아니라 세계 가톨릭교회의 문화 대화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또 다른 중요 선교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성’인들 사이의 문화 교류였다. 당시 정복주의 형태의 선교 현실에서 이같은 태도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리치가 중국에서 취한 문화 교섭에 근거한 선교방식은 당대의 선교 여건상 그야말로 가장 진보한, 그리고 가장 인본주의적인 투신 가운데 하나였다.

리치의 선교 방식으로서의 ‘대화’는 중국의 종교 문화 사회 관습에 대해서도 적용됐다. 리치는 보유론의 관점에 서서 공자의 덕과 조상제사를 통한 효의 실천을 그리스도 ‘신앙 살이’와 대립되지 않은 형태로 지켜갈, 길을 연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유교 사회 체제를 적어도 일정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치는 자신의 적응주의 대화 방식을 통하여 비정치적인 문화 교류를 꾀하고 아시아인들의 안녕과 전혀 배치하지 않는 신법 전파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1620년대부터 상류층 입교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리치가 표방한 존중과 대화가 어디까지 가능성이고 어디부터 한계인가.

리치는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대화는 선별적이고 도구적인 것이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중국인들의 그리스도교 신자화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의 구원 독점주의를 현실 속에서 숱한 폭력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른바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선행을 행한 자신들의 부모조차 단죄 받는다는 구원관을 수용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현재 아시아 각국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리치의 한계 오늘날도 이어져

리치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한문으로 저술하고 소개한 선구적 유럽인이자 동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전통을 일정한 수준을 갖추어 유럽어로 매개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선구’와 ‘최초’란 언제나 제역과 한계를 의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가 열어놓은 대화의 창구를 보다 더 성숙한 대화와 교류의 통로로 확장할 과제를 후배들이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가장 결정적 한계는 신학적 영성적 정직함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중국 사회를 비판할 줄은 알아도 서구 문명과 사회의 불의와 탐욕을 비판하고 교정할 능력과 의지를 제대로 작용시키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선교 신학적으로 리치의 보유론적 도구주의의 윤리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점은 이미 1600년대 중국 선비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비판받아 왔다. 오늘날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서도 주목할 대목이다.

리치는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리치가 유교 문화에 대해서 보이는 인식의 한계와 그리스도교 우월주의는 당연히 그가 들어선 페러다임 곧 당대 그리스도교 세계 인식의 한계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것과의 상관 구도 속에서 논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그의 역할을 종교사 문화사 사상사 정치사의 관점에서 직시하면서 그의 한계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리치가 남겨놓은 한계는 그가 열어놓은 문을 발판으로 삼아서 후대가 끌어안아 풀어주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리치의 후대 아시아 교회는 리치가 안고 있었던 한계들을 극복하여 리치의 위대한 행보를 보다 더 하느님의 다스림에 부합한 형태로 형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한계를 더욱 더 악화시키는 형태로 오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리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한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도 못했다.

리치의 한계는 오늘날 아시아 가톨릭인들의 부족의 깊이를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리치가 배태하고 있었고,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악화시켰던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의 제종교 전통 사이에서 발생했던 파괴적 관계를 지속시킬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정신적 종교적 토대를 나름대로 갖추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 리치부터 오늘의 그리스도인에 이르기까지 유발시킨 불행한 관계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과오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이를 철저하게 극복하려는 사랑과 돌봄의 투신이라고 믿는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동아시아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의 제종교 전통이 서로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관계를 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고 보다 더 탄력있게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마테오 리치 자료 출처 : ‘마테오 리치와 정약용’(황종렬 저, 두물머리 미디어, 031-791-3369)

■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년)

이탈리아 중부 마체라타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 이름은 이마두(利瑪竇)다. 1571년 예수회에 가입했으며 1578년 리스본을 출발, 해외선교에 나서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해 중국어를 배웠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베이징 거주 허락을 받고 선교에 나서는 등 아시아 복음화의 기틀을 놓았다. ‘기하학 원본’ ‘곤여 만국전도’ 등 서양 학문을 중국에 소개했으며 1595년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중국어로 저술했다. 마테오 리치는 이 책에서 하느님이 중국인들이 말하는 상제(上帝)라고 하는 등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접목을 시도했다. 하느님 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인간의 영혼 불멸성을 강조했으며 인간의 영혼이 신령스러움을 중국 고전들을 기반으로 논술했다.

사진설명

대만 외곽지역에서 열린 성모순례행사. 다문화‥다종교 국가인 대만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가톨릭과 중국, 대만 문화 간의 대화 방법을 연구하며 토착화에 노력하고 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