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아시아교회가 간다Ⅱ] 48.카자흐스탄 (2)가톨릭교회의 어제와 오늘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7-07-01 수정일 200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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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유 얻고 부흥 ‘날개짓’

공산정권 박해에 숨어서 신앙유지

다민족 아우르며 보편교회상 구현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비행 일정상 한밤중에 카자흐스탄 알마티공항에 발을 내디뎠지만 벌써 다음날 일정으로 마음이 급해졌다. 계획대로 취재일정이 진행될 지, 확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 카자흐스탄 교회 취재를 시작하면서, 흔쾌히 안내를 도와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김창남(디에고) 수사가 기자에게 처음 전한 말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이곳의 일상은 중국과 같이 ‘만만디(manmandi)’는 아니어도 기자의 속을 태우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참고자료 한 장을 받기 위해 수십번 같은 말을 반복하다 지친 기자는 “카자흐스탄(이하 카자흐)에서 2~3주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오랜 시간 공산정권 통치 아래 수동적으로 살아온 카자흐 사회는 사회 각 분야의 체제를 명확히 세우는 과도기에 서있다. 중앙정부의 경우 강력한 독재정권 지휘에 힘입어 꽤나 그럴듯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그 외 분야는 여전히 ‘ing’ 진행형이다. 각 도시별 거리도 최소 200여km, 교구청간 거리는 600~1200여 km 정도로 이동이 쉽지 않다.

가톨릭교회 내 자료도 여전히 정리 중인 것이 많았다. 그래도 주교회의 의장이자 아스타나대교구 교구장인 토마스 페타(Tmash Peta) 대주교가 직접 정리해준 덕분에 카자흐교회의 역사를 대략 간추릴 수 있었다.

다민족 한자리서 전례

카자흐 도심에서는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이지만 도심 안에서는 러시아정교회성당과 가톨릭성당을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트(첨탑)는 잊을만하면 어김없이 동네 각 어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성당 내 전례모습은 여느 가톨릭교회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전례력에 따른 행사 등도 ‘보편적’인 가톨릭의 모습을 알리는데 손색없었다. 단 다양한 민족의 얼굴들이 한자리에서 전례에 참여하는 모습에 익숙해지는데 조금의 여유가 필요했다.

카자흐 교회에는 아스타나대교구와 카라간다·알마티·아티라우교구 등 총 4개 교구가 설립돼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사제 수는 2007년 6월 현재 80명, 수도자는 110명. 각 교구장과 주카자흐 교황대사를 비롯해 주교단은 총 5명이다. 사제들은 대부분 수도회 선교사들로 폴란드 출신이 가장 많다. 아직 현지인 사제는 없다.

그래도 지난해 카자흐 신자들은 또한가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카자흐에 신학교가 문을 연 지 8년만에 처음으로 사제 서품식이 거행돼 폴란드인 부제 두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이들에게 현지인 사제 양성은 중요한 숙제로 여겨진다. 현재 카라간다에 위치한 대신학교에는 총 15명의 신학생이 재학 중이다. 그중 단 한명의 신학생이 카자흐인으로 현지인 사제 양성의 꿈을 대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 내 각 종교의 역사는 ‘부활’의 역사이다. 대부분이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다시 체계를 세우는 중이다.

중앙아시아 지역 가톨릭교회의 경우 카자흐가 그 중심이 되어왔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카자흐와 중앙아시아 전체를 관할하는 교황청직할서리구(교황이 특별하고도 중대한 이유로 교구를 설립하지 않고 교황 임명 관리자를 두어 교황의 이름으로 사목하도록 하는 지역 교회)가 카자흐 카라간다에 설립됐다.

이후 1997년에는 카자흐를 비롯한 우즈벡·투르크멘·키르기즈·타즈키즈스탄 등이 자치선교구로 분리됐다. 신자수가 늘어감에 따라 교회 체제 확충을 위해 1999년 카자흐교회는 4개 교구장서리구로 분할됐다.

특히 1998년 카자흐정부는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체제를 벗어난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가톨릭교회의 부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례로 더욱 의미깊다.

그리고 2001년 9월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카자흐를 방문하는 역사적인 경험이 이어졌다.

순교사 고증…시복시성 추진

하지만 중앙아시아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시간을 품고 있다. 토마스 주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초원에 가톨릭교리가 전해진 것은 3세기경 실크로드를 통해서라고 한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칭기즈 칸이 통일제국을 세운 13세기경, 몽골제국이 로마에 교황사절단을 청한 것이 직접적인 선교의 시작이다. 교황청에서는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앙아시아 지역 사절로 파견했다.

당시 몽골제국 통치 아래 있던 카자흐와 그 외 중앙아시아 지역의 칸들은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매우 관대했으며, 세금 면제 등의 각종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니콜라오 3세 교황(1277~1280)은 지금의 카자흐 지역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교회 체계를 세워 몽골에서부터 유럽까지를 하나로 이으려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몽골제국(원나라)이 멸망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선교활동은 잠정 중단됐다.

이후 수백년의 공백기를 거쳐 19세기, 카자흐 북쪽 지역 등에 가톨릭성당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1857년에는 사라또베라는 지역에 신학교도 세워져 사제양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1917년 러시아혁명은 모든 종교활동의 맥을 끊어놓았다. 공산정권의 박해로 1200여 개에 달하는 가톨릭교회의 문이 굳게 닫혔다. 당시 수많은 성직·수도자들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오지에 유배됐다. 교황청의 외교노력도 큰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1930~50년대는 박해의 최고조기. 곳곳에서 유혈순교가 있었다. 특히 카라간다 지역에 유배된 수많은 사제들은 지하땅굴에 숨어 신앙생활을 유지했고, 체포와 수감이 반복되는 고초를 겪었다. 현재 카자흐교회는 당시의 순교역사를 고증하며, 시복시성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카자흐교회의 영적 구심점인 카라간다 지역 성지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현지인 사제 양성으로 교회 재건·자립이뤄야”

◎카자흐스탄 주교회의 의장 토마스 페타 대주교

“카자흐교회의 자립을 위해 무엇보다 ‘교육’ 지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인 사제를 양성하는 것도 카자흐교회의 큰 숙제입니다.”

카자흐스탄교회 주교회의 의장이자 아스타나대교구 교구장인 토마스 페타(Tomas Peta) 대주교가 전한 교회의 모습은 재건을 위한 활발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카자흐교회의 현재 역량 안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매우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토마스 대주교는 교회 재건과 선교를 위해 청소년 교육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청소년을 위한 일일피정조차도 외국 기관단체의 후원이 없으면 실시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도 카자흐교회의 재건 즉 성당건축을 비롯한 각종 운영 전반이 외국교회 원조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현재 활동 중인 성직·수도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속한 수도회와 각종 기관단체 등의 지원으로 교육과 시설 운영 등을 독립적으로 책임진다.

특히 토마스 대주교는 성직·수도자 부족을 선교활동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지적한다. 토마스 대주교도 본당사제 시절 60여 개의 마을을 혼자 돌면서 미사봉헌과 영성지도를 해왔다.

토마스 대주교는 “최근 국민 모두가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앞으로 영적 지원이 더욱 절실하다”며 “이슬람의 종교관습상 사목적 배려를 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지만 ‘교육’을 지속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지금의 카자흐 사회 전반은 경제성장에 몰입하고 있어 물질주의의 폐해도 두드러진다.

“카자흐는 작은 교회이지만,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이 직접 찾아올 수 있도록 모범적인 삶을 사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선교가 아무리 어려워도 사도 바오로께서 걸었던 길보다는 쉽지 않을까요.”

토마스 대주교가 교구장으로 있는 아스타나 대교구는 2005년부터 카자흐교회 역사상 처음 시노드를 진행 중으로 그 결과 또한 주목된다.

사진말

▶2001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은 공산정권 붕괴 이후 카자흐스탄 재건 역사상 가장 큰 행사로 꼽힌다.

▶알마티교구 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주일미사 중 신자들이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