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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47.카자흐스탄 (1)신(新) 실크로드를 꿈꾸다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7-06-24 수정일 200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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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유럽 잇는 요충지로 부활

다양성 인정 화합으로 ‘다민족’ 극복

이슬람국가 불구 ‘종교간 대화’ 활발

“지금은 공사중.”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와 옛 수도 알마티에서 가장 많이 본 표지판이다.

카자흐스탄 공화국(이하 카자흐)과의 첫 만남은 공사현장들과의 부딪힘이었다. 도시마다 시가지는 물론 근교지역까지 그야말로 온통 ‘공사판’이다.

수도 아스타나의 경우는 절반 가까운 수의 건물을 새로 올리는 중이었다. 도시의 모습을 바꾸는데 연간 수십조원의 예산을 쏟아붓는다고 한다. 건물의 이름을 물을 때마다 카자흐인들의 눈빛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꽤 많은 시간을 ‘공사중’ 표지판으로 막힌 도로와 건물들을 피해 돌아가는데 소비하며 카자흐 사회 속으로 잠시나마 들어가보았다.

카자흐는 중앙아시아 가운데 오아시스와 같이 자리잡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그리 가깝게 느껴지는 지역은 아니었다.

그런데 각종 시장에 들어서면 각종 김치와 된장, 순대 등의 우리나라 음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카자흐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음식들을 즐긴다. 카자흐 인구를 구성하는 민족 중 9위를 차지하는 10만여 명의 한민족(고려인) 덕분이다. ‘고려인’들을 언급하게 되면 카자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카자흐스탄은

‘카자흐’는 현지어로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자유인’을 의미한다.

이들 ‘자유인’의 가장 큰 특징은 131개나 되는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국가공동체를 이루고, 뛰어난 화합정신을 보인다는 점이다.

광활한 스텝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배경 때문일까. 이들에게서는 개방성과 관용의 정신이 삶의 지혜로서 돋보인다. 실제로도 구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나라들 중 유일하게 전쟁이나 인종간 갈등을 겪지 않고 안정을 누려왔다. 2005년 카자흐 정부 통계에 따르면 1700여 만명의 인구 중 카자흐인은 53% 가량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러시아인은 30%, 우크라이나인이 4%, 독일인이 3%, 고려인은 0.6% 비율이다. 또한 정부에서는 카자흐어 부흥정책을 펴고 있지만 아직은 대부분 국민이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카자흐를 소개할라치면 우선 광활하게 펼쳐진 대초원의 풍광을 펼쳐보인다. 카자흐의 국토는 동서길이가 3000km나 되는 스텝(초원) 지역. 상당부분은 여전히 사막과 대초원으로 남아있는 불모지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야생마가 남아있는 곳도 있다.

남한의 26배 크기, 세계에서 9번째로 큰 국토는 광물자원의 보고로 최근 세계적으로 가치가 급부상했다. 이러한 자원은 오랜 기간 유럽과 아시아를 이은 실크로드의 한 부분이었던 카자흐가 21세기 신(新)실크로드를 부활시키는데 탄탄한 뒷받침이 된다.

카자흐는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전략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러시아와 중국,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국경을 같이하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와 면한다. 자연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그 가치는 더욱 높다. 수도 아스타나에 최근 새로 설립된 최고 국립대학의 이름을 ‘유러시안 대학(Eurasian University)으로 지은 것도 동서간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란다.

카자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 땅위에서 100여 개의 씨족과 종족, 민족의 운명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현 카자흐 민족의 직접 조상은 기원전 1세기경 현재의 카자흐 영토에 정착한 터키계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각 종족들과 특히 몽골계가 더해져 민족적 기원을 뚜렷이 밝히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던 카자흐는 1219년 몽골제국에 점령되면서 ‘카자흐인’이라는 명칭을 쓰게 된다. 1860년에는 러시아제국에 편입됐고, 러시아혁명 후 공산당의 민족정책에 따라 자치공화국이 되었다가 1936년 연방공화국으로 승격된다. 그리고 1991년 구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공화국으로 새 틀을 짰다.

공산주의 통치를 벗어난 지 이제 겨우 16년째이지만, 사회 전반에서는 ‘발전’을 향한 장미빛 전망이 두드러진다. 과감한 개혁과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정부의 추진력도 2000년대 들어 한창 가속도가 붙었다. 과거부터 중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꼽힌 우즈베키스탄을 추월한지도 오래다.

변화 배경에는 현 대통령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자리잡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과감한 개방정책과 개혁을 추진하는 중이다. 17년째 장기 독재집권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국민들의 ‘파파(아버지)’로 불린다.

카자흐스탄의 종교

중앙아시아 각 국가명 뒤에는 ‘스탄’이 붙어있다. ‘스탄’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된 ‘땅, 나라’라는 뜻. 이슬람교 국가들은 대부분 국가명 끝에 이 어미를 붙인다.

나라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카자흐는 전형적인 이슬람교 국가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과 달리 카자흐의 종교적 배경은 이슬람교가 큰 몫을 차지한다. 카자흐인들은 16세기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후 지금까지도 자신들을 무슬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거리 곳곳에서는 예상과 달리 차도르와 히잡을 걸친 여성들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정부 정책 상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현재 카자흐 인구의 과반수는 이슬람교, 30% 가량은 러시아정교회 신자다.

카자흐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또 한가지 특징은 강력한 종교 화합 정책이다. 카자흐는 중앙아시아에서 종교간 대화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독립 이후 헌법에 종교적 자유를 명시했으며, 특히 대통령은 강력한 종교화합 정책을 추진한다. 덕분에 세계종교지도자대회도 2회나 유치했으며, 2001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는 역사적인 성과들을 이뤘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하지만 카자흐 사회 속으로 들어가보면 이들에게는 이슬람교보다 무속신앙이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자흐인들의 종교문화는 매우 기복적이다. 따라서 각 종교들에 관대하기도 한 반면 관심 또한 부족하다.

특히 이슬람교의 관습은 전통 민속신앙과 결합돼 생활습관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장 큰 원인은 유목생활을 거쳐 정착한 것과, 공산주의 체제의 종교억압정책, ‘종교는 마약이다’라는 주입식 교육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긴 하지만, 카자흐 사회에서 각 종단의 선교활동도 최근까지 그리 자유롭지 못한 편이었다. 정책상 온갖 제재들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카자흐에는 가톨릭교회의 십자가가 꾸준히 늘고 있다. 빈부의 양극화가 심각한 카자흐 사회 안에서 더욱 힘겨워하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곁에는 바로 ‘가톨릭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울러 카자흐의 가톨릭교회 또한 21세기 신(新) 실크로드 교회를 꿈꾸며 재건을 위해 한창 ‘공사중’이었다.

사진말

▶카자흐인들은 광활한 스텝(초원)을 전통적인 삶의 터전으로 삼아 131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살아간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에서는 공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