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61】중심은 바닥에 있다. 멍석처럼!

입력일 2007-05-27 수정일 2007-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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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히는 예수를 품고 살아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중(中)은 사상의 한 핵심을 구성한다. 중(中)이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無過不及)을 뜻한다.

균형을 이루어 치우침이 없는, 혹은 때에 맞추어 조화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군자가 중용(中庸)을 취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균형과 조화를 삶의 가치로 지향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나는 중(中)을 어떻게 보는가? 중은 □과 l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자는 모두 네 획으로 이루어지는데, 왼쪽 획이나 둘째 획, 혹은 아래에 놓인 셋째 획, 어느 한 획이 빠지더라도 “중”을 이루지 못한다. 이 하나하나에 충분히 머물 줄 아는 머무름의 영성이 필요하다.

“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中”을 통으로 보는 것 못지 않게, 中을 구성하는 하나 하나를 그 자체로 볼 줄 아는 영성의 품 역시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이 세 획과 함께 “중(中)”이 中이 되게 하는 그것, “뚫을 곤( l )”이 갖는 의미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땅에 깃발을 꽂는 것과 연결지어서, 中을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중앙 거점을 형상화한 글자로 보아서는 “중”의 영성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은 앞서 쓰여진 세 획이 상징하는, 자기 자신부터 시작하여 우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뿌리에 닿기 위하여 “내려서는 것”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中은 세상 만물을 만물로 살게 하는 그 원천을 향하여 뿌리내려 가는 운동을 상징하며, 그 뿌리에 닿아서 만물이 이루는 균형과 조화를 상징하며, 궁극적으로는 세상 만물을 있게 하는 그 중심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미 中이라는 글자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중심은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장 깊은 곳, 바닥 중의 바닥에 있다. 우리의 생명의 뿌리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 그것이 중심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지구와 지구 표면의 삼라만상의 관계에서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몸 붙여 살고 있는 지구(地球)는 말 그대로 구(球)다. 둥근 실체이다. 이 둥근 지구 현실에서 중심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비움의 도를 계시하시기라도 하는 듯, 지구의 중심을 바닥의 바닥에 마련하여, 지구상의 온갖 사물과 존재가 이것과 이어져서만 비로소 똑바로 설 수 있게 하셨다. 실로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중심은 맨눈으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저 깊은 심연, 맨 밑바닥, 지구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 둥근 세계에서는, 중심 바닥이 모두를 붙들어 세우는 데 힘입어서,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며 존재한다. 이 관계에서는 더 이상 위 아래, 지배 종속, 우열 열등은 진정한 관계가 되지 못한다. 둥근 지구로 표상되는 하느님의 생명의 세계에서는 상호 존중과 돌봄이 세계의 기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장 깊은 바닥을 중심으로 갖는 지구 현상은 자기 중심의, 특히 지배 계층 중심의 역사 이해와 해석을 하느님이 정상적인 것으로 용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계시하는 한 언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이것이 야훼의 신 중의 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되기 방식이다. 멍석이 되어 밟히는 것, 이것이 중심이 온 마음으로 지켜갈 일이다. 밟고 춤추게 하는 창조적 신실(誠), 이것이 중심의 존재 이유이다. 놀던 이들이 떠나면? 그러면 따라가면 된다. 따라가서 다시 밟히는 것, 이것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끝까지.

보라, 엔도 슈사끄가 이해한 예수를. 2006년 6월에 소개한 ‘침묵’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예수는 세상 끝까지, 아시아의 동쪽 끝 일본까지 따라와서 밟히신다.

당신을 밟고 건너게 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을 밟았던 그 때를 기억하며 밟힐 줄 아는 영으로 살도록.

로돌리코 신부가 자기를 관리에게 넘겨주었던,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으로 치지도 않았던 그 기치지로를 다시 기치지로로 살도록 다리가 되어 준 것은 그가 마침내 “밟히는 예수를 품고 사는 영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대는, 누구의 멍석으로 존재하는가, 오늘?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