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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동아시아 토착화의 길: 성(誠)

입력일 2007-04-22 수정일 200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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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도 알아야 한다

창세기 저자는 노래하듯 증거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말씀하신(言) 대로 이루신다(成)고.(창세 1, 3. 6. 9. 11. 14~15. 20; 이사 55, 10~11 등 참조)

말한 대로 이루는 것이 바로 신실(誠)인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느님에 관한 학으로서 신학의 본질에 관하여 진술하면서 통찰하였듯이(신학대전 1부 1문 4항) 하느님은 말과 생각과 실천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신실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자기가 말한 대로 이룰 사명과 축복에로 초대된 존재들이다.

앞에서 한국“의” 교회가 되지 못할 때,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가서 그 지역“의” 교회가 성숙하게 뿌리 내리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자기가 알아야 할 그리스도 왕국의 가치들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 뿌리 내리게 함으로써 주체적 한국 교회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그 가치들을 성숙하게 매개하고 그것들을 건강하게 자라게 할 가능성은 그만큼 약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과거 유럽과 북미 교회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선교를 한다면서 도리어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를 파괴한 역선교의 근본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서구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 토착화시킨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가치가 아니라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자신들이 그것들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형성한 외적 표현 방식들을 주입하려고 하였다.

이보다 더 안 좋은 형태로는 이런 외적 표현 방식들을 앞세워서 그리스도의 저 하느님 다스림의 가치들을 거슬러서 반그리스도적 지배를 획책하기조차 하였다. 이를테면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의 하느님 생명의 질서에 역행하는 형태로 식민지배를 꾀한 것은, 단순히 정치 문제인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저 생명의 다스림을 깊이 토착화하지 못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응답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때 절대적인 것은 실로 하느님과 예수의 사랑과 생명의 다스림이지, 여기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외적 교회 조직이 아니다.

역사의 산물로서 교회를 절대화할 때, 이것을 “교회 절대주의”라고 일컬어 왔다. 그러나 근현대 그리스도교의 식민지배형 선교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행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까지도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지배와 폭력,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할 도구로 전도시켜 왔다. 모택동은 그리스도교의 이같은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한 적이 있다. 그가 안나 루이스 스트롱이라는 언론인과 대담할 때,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스트롱이 “갇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답하자, 모택동이 한마디로 되물었다.: “당신들이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해왔습니까?”(Jean Charbonnier, “The Reinterpretation of Western Christianity in terms of China Past and present,” in China As a Challenge to the Church,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9, 56~7) 모택동이 여기서 제기한 것은 바로 성(誠, sincerity)의 문제이다. 그는 단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자기가 한 말(言)을 실행(成)하였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모택동의 질문은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적어도 1840년 아편 전쟁 이래 100여 년에 걸쳐 자행한 파괴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차이나 민중의 기억을 대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3월에 만난 한 차이나 성직자는 자신들은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하느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을 내세워서 도리어 자신들의 생명과 문화들을 파괴한 거스름의 역사를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아시아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비극적 역사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같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발생시킨 이런 아픈 역사를 명시적으로 자각하여 건강하게 극복하지 못하고는, 특히 차이나에서 바람직한 방식으로 복음화를 이룰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 상태에서는 차이나 정부의 선교 제약을 종교 탄압이라고 비판할 줄은 알아도, 자신의 억압과 착취, 폭력과 지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차이나 민중과 함께 아파하면서 진정으로 복음적 관계를 구현해 가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선포는 언제나 종교적 신실(誠)을 요청하는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